무심한 발짓에 무너진 생의 필연적 허무에 대하여
비가 내리는 날의 보도는 누군가에겐 낭만적인 풍경이지만, 낮은 곳에서 몸을 누이는 존재들에겐 매 순간이 생사를 건 투쟁의 장이 된다.
회색빛 아스팔트 위, 젖은 노면을 느릿하고도 충실하게 가로지르는 작은 달팽이 한 마리를 본다.
자신의 전 생애와 가문의 무게를 짊어진 듯한 그 작은 껍질. 조금이라도 더 나은 습기를 찾아, 혹은 본능이 가리키는 미지의 목적지를 향해 근육을 쥐어짜며 나아가는 저 뒷모습은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숭고하다 믿어온 삶의 의지와 맞닿아 있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무게를 가볍다 여긴 적 없었을 것이며, 그 미미한 전진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온몸의 점액으로 처절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숭고함은 단 한 번의 무심한 발짓 앞에서 허망할 정도로 무력해진다.
'빠각' 하고 울리는 메마른 파열음.
우산을 들고 갈 길 바쁜 행인의 신발 밑에서 달팽이의 견고했던 성(城)은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으깨진다.
방금까지 존재했던 하나의 우주가 단 1초의 주의도 기울이지 않은 타인에 의해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순간이다.
가해자는 자신이 무엇을 으깼는지, 어떤 생의 마침표를 찍었는지조차 모른 채 경쾌한 보폭으로 멀어져 간다.
그 발밑에 묻은 것은 하찮은 흙덩이가 아니라, 누군가가 온 생애를 바쳐 밀어 올린 시간의 결정체였음에도 말이다.
우리는 이 파열음 앞에서 잠시 멈춰 서야 한다. 으깨진 패각 사이로 진득하게 흘러나오는 생명의 흔적을 보며, 나는 세상이 말하는 '운'과 '필연'의 잔혹함을 생각한다.
달팽이가 게을러서 죽은 것이 아니다. 그가 방향을 잘못 잡았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제 속도에 맞춰 성실히 나아갔을 뿐이지만, 거대한 세계의 흐름과 무지한 발길질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생은 그저 '재수가 없었다'는 무책임한 말로 요약된다.
비극은 늘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오며, 그 비극의 무게는 피해자가 짊어진 삶의 깊이와는 상관없이 무차별적이고 냉혹하다.
우리의 삶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자신의 무게를 묵묵히 견디며 기어가지만,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의해 언제든 으깨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들이다.
자본의 거대한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 속도를 미덕이라 숭상하는 사회의 무거운 발걸음 아래서 우리는 늘 달팽이의 운명을 공유하며 산다.
누군가의 해고 통보가, 예상치 못한 사고가, 혹은 타인의 가벼운 말 한마디가 우리가 평생을 공들여 쌓아온 마음의 패각을 순식간에 가루로 만든다.
내가 쌓아 올린 견고한 일상이 사실은 단 한 번의 무심한 압력에 무너질 수 있는 얇은 칼슘 껍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존재의 근원적인 고립과 공포가 밀물처럼 밀려온다.
으깨진 잔해는 비에 씻겨 내려가며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 세계는 여전히 바삐 움직이고, 비는 그칠 줄 모르며, 길 위에는 또 다른 달팽이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제 삶을 끌어당긴다.
이 비정한 순환 속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어차피 으깨질 운명이라면 나아가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한 것일까.
신이 있다면 이 허무한 파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어쩌면 세상은 처음부터 의미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무겁게 굴러가는 바퀴와 그 밑에서 속수무책으로 으스러지는 존재들이 있을 뿐이다.
자본은 효율을 위해 생명을 으깨고, 권력은 유지를 위해 진실을 문지른다. 그 거대한 질서 속에서 한 개인의 사투는 얼마나 가냘픈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남겨진 점액질의 궤적은 침묵 속에 외친다.
비록 결과는 참담한 파쇄였을지라도, 적어도 으깨지기 직전까지 그는 온 힘을 다해 자신만의 방향으로 전진하고 있었음을.
그 끈적하고도 투명한 길은 그가 이 땅 위에 존재했다는 유일한 항거이자 기록이다.
비극의 본질은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토록 치열했던 생의 기록이 타인의 무심함에 의해 너무나 쉽게 지워진다는 사실에 있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세계는 그렇게 수많은 달팽이의 궤적을 지우며 자신의 속도를 유지한다.
우리는 서로의 패각이 으깨지는 소리를 듣지 못할 만큼 너무 빠르게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비에 젖은 보도 위를 조금 더 신중하게 걷기로 한다. 내가 무심코 내딛는 보폭 아래 누군가의 우주가 비명을 지르며 으깨지고 있을지도 모르기에.
나의 무지가 타인의 전부를 무너뜨리는 가해자가 되지 않기를 기도하며, 길 위에서 으깨진 한 생명의 파편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비는 여전히 무심하게 대지를 적시고, 부서진 껍질은 차가운 빗물에 씻겨 어둠 속으로 스며든다.
작은 생명의 파열음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것은, 견고해 보이는 우리의 삶 또한 단 한 번의 무심한 우연에 무너질 수 있다는 서늘한 경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