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 위의 검은 화석, 씹다 버린 껌의 집착

지울 수 없는 낙인, 단물 빠진 관계가 남긴 끈적한 잔상

by 풍운

횡단보도 앞, 신호를 기다리며 무심코 발밑을 내려다보다 아스팔트와 한 몸이 되어버린 검은 얼룩들을 발견한다.

한때는 화려한 포장지에 싸여 누군가의 입안에서 달콤한 향기를 내뿜었을 녀석들이, 이제는 단물만 쏙 빼먹힌 채 차가운 바닥으로 뱉어져 지독한 흔적으로 남은 것이다.

누구에게나 환영받던 그 말랑하고 달콤한 존재는, 쓸모를 다하는 찰나에 가장 혐오스러운 폐기물로 전락하여 사람들의 신발 밑창에 들러붙는 천덕꾸러기가 된다.

우리는 필요할 땐 그 달콤함을 탐닉하며 온 힘을 다해 씹어대지만, 향기가 사라지는 순간 한 줌의 미련도 없이 혀끝으로 그것을 밀어내 버린다.

바닥에 눌어붙은 껌은 우리가 타인에게 남긴, 혹은 타인이 나에게 남긴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형상이다.

사랑이나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단물을 나누던 관계가 끝났을 때, 우리 마음 바닥에는 저렇게 까맣게 타버린 껌 자국 같은 기억들이 남는다.

억지로 떼어내려 할수록 오히려 더 끈적하게 늘어지며 주변을 더럽히고, 결국엔 시간이 흘러 딱딱하게 굳어버려 영영 지울 수 없는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단물이 빠진 뒤에도 사라지지 못하고 바닥을 뒹구는 저 껌의 운명은, 정리가 채 되지 못한 채 마음 언저리를 떠도는 구차한 미련과 닮아 있다.

사람들은 저 지저분한 자국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지만, 사실 저 껌들이 저토록 질기게 바닥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어쩌면 마지막까지 잊히지 않으려는 절박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뱉어낸 주인의 뒷모습을 보며, 껌은 누군가의 발밑에라도 들러붙어 끝까지 그와 연결되고 싶어 하는 기괴한 집착을 부린다.

관계의 끝에서 우리가 보여주는 추한 매달림이나, 끝내 놓지 못해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지독한 외로움이 아스팔트 위 껌의 모습에 그대로 투영된다.

가장 달콤했던 것이 가장 추한 흔적이 되는 이 아이러니는, 우리가 맺어온 수많은 인연이 가진 본질적인 비극이기도 하다.

도시의 청소부가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도 껌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이미 지면의 미세한 틈새까지 자신의 살점을 밀어 넣고 한 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준 마음을 거두어들이려 할 때, 이미 상대의 삶 깊숙이 파고든 나의 흔적들이 칼날로도 도려낼 수 없는 흉터가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상처받지 않으려면 애초에 단물을 내어주지 말았어야 했고, 더러워지지 않으려면 바닥으로 내려앉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늘 다시 새로운 껌을 입에 넣고, 또다시 바닥에 뱉어질 것을 알면서도 그 찰나의 달콤함에 생의 모든 감각을 집중한다.

단물이 빠졌다고 해서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껌의 진짜 싸움이 시작된다.

사람들의 무관심과 뜨거운 햇볕, 그리고 차가운 빗줄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껌은 자신을 밀어낸 세상을 향해 끈질기게 저항한다.

검게 타들어 가면서도 바닥에 납작 엎드려 제 자리를 지키는 그 모습은, 어쩌면 화려한 전성기보다 더 치열한 생존의 기록일지 모른다.

우리가 애써 외면하려 했던 관계의 찌꺼기들이 실은 우리 삶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지층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저 껌은 온몸이 짓눌린 채 증명하고 있다.

무심코 지나가는 수만 개의 발길에 밟히고 짓눌리면서 껌은 점점 더 단단해지고 점점 더 검게 변해간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껌이 아니라 도시의 역사를 기록하는 거칠고 투박한 화석에 가깝다.

우리의 마음도 수많은 이별과 배신이라는 발길질에 밟히다 보면, 어느덧 무감각해진 채 딱딱한 옹이가 되어 박혀버린다.

더 이상 누구에게도 들러붙지 않고,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는 상태가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성숙해졌다고 자위하지만, 사실 그것은 유연함도 잃어버린 채 그저 바닥의 일부가 된 고립일 뿐이다.

신호등의 초록불이 켜지고 사람들은 다시 저 껌들을 밟으며 길을 건너간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저 검은 얼룩들은, 우리가 목적지에 닿기 위해 누군가의 간절했던 시간을 얼마나 무심하게 딛고 지나왔는지를 보여주는 창백한 기록이다.

세련된 도시의 풍경 뒤에 숨겨진 저 비릿한 흔적들을 보며, 나는 내가 뱉어낸 말들과 내가 저버린 마음들이 지금 어느 길가에서 저토록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을지 생각한다.

지워지지 않는 것은 껌이 아니라, 그것을 뱉어내고 도망친 우리의 무책임한 발걸음인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누군가의 신발 밑창에 달라붙어 본 적이 있고, 또 누군가에게 단물 빠진 껌처럼 무참히 뱉어져 본 적도 있다.

그때마다 우리는 바닥을 원망하거나 자신을 탓하며 서둘러 그 흔적을 지워내려 애쓰지만, 사실 그 끈적거림이야말로 우리가 한때 누군가에게 진심이었다는 가장 솔직한 고백일지도 모른다.

아스팔트 위에 점처럼 박힌 저 껌들은 이제 미워해야 할 얼룩이 아니라, 우리가 이 거친 길을 함께 걸어왔다는 작고 고단한 삶의 훈장이다.

그것이 아무리 까맣게 변하고 딱딱하게 굳었어도, 그 속에는 여전히 우리가 나누었던 짧은 달콤함과 서로의 삶을 파고들었던 뜨거운 마찰의 기억이 숨 쉬고 있다.

이제는 길을 걷다 발밑의 얼룩을 보아도 너무 서글퍼하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기로 한다.

우리가 딛고 선 이 길은 완벽하게 깨끗한 평면이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남기고 간 서툰 인연의 조각들이 촘촘히 메워 만든 가장 다정한 바닥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삶이란 가장 달콤했던 순간을 가장 추한 흔적으로 바꾸어가며, 그 끈적거리는 회한을 신발 끝에 매단 채 묵묵히 걸어가는 과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