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 초 교과서를 받으면 제일 먼저 문학책을 펼쳐 처음부터 끝까지 읽던 아이는 이하윤 작가의 '메모광'을 읽고 메모광을 동경하게 된다. 나의 수첩, 노트 사랑은 이것으로부터 시작되어, 문방구에서 파는 천 원짜리 수첩부터 각종 브랜드의 노트를 거쳐 클래식한 로디아, 미도리, 몰스킨까지 안 가져 본 노트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작은 문제가 있었는데 나는 결코 메모를 하지 않는 타입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노트에 수십만 원을 들여놓고는 정작 그것들은 처음 한두 장 끼적인 채로 끄트머리부터 변색되어 그대로 먼지가 쌓여갔다. 메모광을 동경하였으나 결코 메모광이 될 수 없었던 아이는 결국 노트를 모으는 것조차 중단하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까, 어느 날 호보니치의 검은색 일기장에 반해 오랜만에 값비싼 노트를 사게 되었다. 쓰지 못할 금액은 아니지만 손바닥만 한 수첩 하나에 4만 원 돈이니 결코 보편적이라고 할 것도 아니다. 그래서일까, 나는 올해 이 일기장은 빈 페이지 없이 한번 채워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손바닥만 한 한 페이지의 일기를 쓰는 데는 10분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다 문득 일기장을 열어보면 기억도 잘 나지 않는 4, 5일 전부터 빈 채로 남아있기 일쑤였다. 그걸 한꺼번에 쓰려면 적어도 30분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야했고 그건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었다. 일기의 내용은 정말이지 대수로운 것도 없었다. 피곤하다 지친다 이렇게 사는 게 맞냐 로또 1등 당첨되고 싶다, 로 점철될 뿐이었는데 친구에게 아무튼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라도 매일 일기를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드디어 그토록 바라던 기록하는 사람-메모광에 한발 다가선-이 되었네'라고 답해주었다. 그토록 바라던 사람이 되다. 이 얼마나 가슴 뛰는 문장인가
나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뛰었다. 수십 수백 권의 새 노트들을 버리며 나는 20여 년 만에 드디어 내가 그토록 바라던 사람이 된 것이다. 동시에, 로또 1등 기원 같은 하나 마나 한 이야기 말고 조금 더 기록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기록을 하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때 아, 나 어쩌면 좀 더 제대로 잘 살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살고 싶어 하는 걸 스스로 몰랐다는 생각. 그러고 보니 매일 힘들다고 투덜거리는 사람, 앓는 소리만 하는 사람, 짜증 난다고 칭얼거리는 사람 우리는 모두 그저 좀 더 잘 살고 싶은 거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