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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역띠 Sep 23. 2021

된밥과 진밥

_사소하지만 중요한 차이에 대해



 
니은띠의 밥은 언제나 좀 질다. 나는 된밥이 좋은데 니은띠는 진밥을 좋아한다.

그래서 니은띠가 밥을 한 날은 언제나 밥이 좀 질다.
 
옳고 그름이 없는 취향의 문제라는 것을 알지만 나는 그게 싫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누군가는 옳고, 누군가는 반드시 틀려야지만 끝이 난다. 부부 사이에 이런 문제들은 비단 밥의 질감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뭐랄까, 좀 더 광범위하면서도 구체적인 영역에서 말 그대로 밥 먹듯이, 일어난다.
 
설거지는 식사 직후, 곧바로 해치워야 한다. 아니다, 기름때나 밥풀 같은 것들은 따뜻한 물에 불려놨다 해야 깨끗이 닦인다. 주말에는 좀 쉬자, 무슨 소리? 주말에는 당연히 교외로 놀러가야지. 지금 바로 하자, 급한 거 아니면 나중에 하자. 나가자, 그냥 있자. 라면에 계란을 푸냐 마냐, 오늘 저녁은 뭐 먹냐. 떡볶이냐 해물찜이냐, 대충 먹자, 제대로 해 먹자 등등…
 
지나고 생각해 보면 답도 없는 문제들로 우리는 많은 시간 의견을 나누고, 때로는 다투기도 한다. 부먹이냐 찍먹이냐처럼 답도 없는 문제를 두고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으며 그렇게, 어찌 보면 아까울 정도로 많은 시간을 함께, 만 1년 9개월 차 풋내기 부부는 오늘 하루 서툴게 보내는 중이다.





 

연애 시절엔 지금보다 이해의 폭이 더 넓었던 것 같다. 좀 귀찮더라도 주말에 집을 나서고, 더 먹고 싶은 음식이 있어도 니은띠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었다. 대화가 잘 통했고, 서로 어쩜 이리 잘 맞는지 모르겠다며 과장 조금 섞어서 98.72% 쯤 일치하는 것 같다고 농담 섞인 진담을 꺼내놓곤 했다. 나는 꽤 동적인 취미를 여럿 가지고 있었지만 정적인 니은띠의 성향 덕분에 함께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독서를 하는 등 일상적인 취미를 함께할 수 있어 참 좋았다. 니은띠는 결점 없이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니은띠의 그 결점이 크게 거슬린 적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충분히 포용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98.72%를 뺀 나머지 1.28%가 집요하게 나를 괴롭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느꼈던 성향적 일치는 순전히 나만의 착각이었던 걸까. 가족이 된 지금, 나는 상당한 성향 차이로 스트레스를 받는 중이고, 굉장히 엄격한 잣대로 니은띠의 행동들을 평가하고 지적했다. 결혼 이후 니은띠가 변한 걸까.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니은띠는 그대로인데 대체 내가 왜 그러는 걸까 생각해 보니, 두 사람의 차이는 관계의 변화로 인해, 그것이 비록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생활의 영역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영역은 엄밀히 말하면 내 울타리 바깥의 일이다. 연애 시절 니은띠와의 사소한 의견 차이나 성향 차이들은 그저 타인의 일일뿐이었다. 그러나 생활의 영역에서 니은띠와 나의 의견 차이는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심각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생활을 공유하는 사이에게는 그것이 아주 사소한 차이라 할지라도 각자의 루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평생토록 식사를 마치면 곧바로 설거지부터 해온 내게는 잠시나마 설거지를 미뤄두는 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서로 다른 집에 살며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 연애하던 시절의 일이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지만 생활의 영역이 된 지금, 부부가 되어 한집에 살게 된 지금으로선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가 절대 없었다. 티끌처럼 사소한 문제로 시작해 대부분 싸움은 태산처럼 커졌다. 태산의 정점에선 용암이 터져나오듯 서운함이 터져나오곤 했는데, 하루는 니은띠가 던진 말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기역띠, 미안한데 나는 기역띠가 한 밥을 먹으면 꼭 생쌀을 씹는 것 같아."
 


또 다시 지나고 보면 참 사소한, 그러나 중요한 차이들로 다투고 난 뒤 여기저기 널려있는 화산재를 주섬주섬 정리하며 우리는 늘 다시, 생각해 보곤 한다.

이게 그렇게까지 화낼 일이었나?

도대체 내가 왜 그런 거지?

… 그러나 사과는 늘 어려운 일이다. 진밥을 좋아하는 니은띠를 이해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추석 연휴 가족들끼리 절에 다녀오는 차 안에서 또 다시 된밥과 진밥에 대한 토론이 이어다. 진밥은 위가 약해 소화를 잘 못 시키는 사람들이 먹는 것이라느니, 무슨 소리냐고 된밥은 물도 아까운 양민들이나 먹던 밥이 양반은 진밥을 먹었다느니 하며 목소리를 높이다 누가 먼저랄 도 없이 다들 깔깔 으며 답 없는 논쟁은 평화롭게 마무리됐다. 이긴 사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진 사람도 없었다. 오랜 세월 함께 지내며 이루어진 생활의 결, 된밥이니 진밥이니 따지는 일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는 농이라는 사실을 가족에게 자연스레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니은띠는 밥그릇에 밥을 옮겨 담으며 오늘은 물을 좀 적게 넣어 봤다고 말했다. 어떠냐고 묻는 니은띠에게 나는 맛있다고 대답했다. 니은띠는 그제야 안도한 듯 편안한 미소를 띠었다. 나도 웃었다. 나는 니은띠의 동글동글한 미소가 좋다. 사소한 것이든 중요한 것이든 우리가 마주할 뾰족한 차이들은 이렇게 세월의 풍파에 깎여 닮아갈 테다. 내가 좋아하는 니은띠의 미소처럼 동글동글한 모양으로.
 
그래도 여전히 내게 니은띠의 밥은 여전히 좀 질다.

우리의 갈 길은 멀고 또 많이 남았다. :)
 


_21. 09. 23. 역띠와 니은띠의 이야기.

_with 사각사각 글쓰기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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