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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역띠 Feb 25. 2022

우리집엔 극락조 한 분(盆)이 계신다

_적당한 보폭으로 함께 오래 걷기.







우리집엔 극락조 한 분(盆)이 계신다. 신혼집을 꾸밀 때 들여놓은 것인데, 니은띠의 강력한 주장에 의한 것이었다. 요새는 플랜테리어가 대세래나, 뭐래나. 그렇게 함께 지낸 세월도 어언 2년. 애초에 집의 미관을 위해 들여놓은 식물이다 보니, 나도 니은띠도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한 채, 키운다는 느낌보다는 하나의 조경으로서 그분을 대했던 것 같다.



하루는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검색을 좀 해봤더니, 극락조는 하루에 한 번씩은 충분한 물을 주어야 한다고 한다. 나는 스투키나, 선인장처럼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씩만 물을 주면 되는 걸로 알고 있었고, 그나마도 니은띠에게만 맡겨 둔 상황이라 그분께 언제 마지막으로 물을 주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니은띠와 상의해 상한 잎은 솎아내고, 지금부터라도 잘 키워보자고 말했다. 정화수를 떠다 놓고 기도하듯 정성껏 물을 떠 와 매일 매일 물을 주기 시작했고, 앞으로 건강히 잘 자랄 그분의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서 흐뭇한 마음으로 기대감을 키우던 중이었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어제도 기쁜 맘으로 물을 떠 와 화분에 물을 주었는데 조금 지나자 화분 받침 너머로 갈색 흙탕물이 철철 흘러넘치는 것이 아닌가. 조금 넘치다 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닦아도 닦아도 계속 넘쳐 결국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화분을 들어 화장실로 옮겨야 했다. 어찌나 물을 많이 먹었는지 화분은 평소보다 갑절은 무거웠다.



아, 인생의 이치가 대개 이러하지 않을까. 과유불급. 세상일은 무엇이든, 모자라서도, 넘쳐서도 안 된다. 의욕만 너무 앞세워 물을 쏟아부어서도 안 되고, 너무 무심해서도 안 된다. 모든 일에는 적당한 수준이 있다. 낑낑대며 화분을 나르고 물범벅이 된 바닥을 닦으며 나는 그 당연하면서도, 참 어려운 진리를 새삼 깨닫고 있었다.


          

...

...

...



돌이켜 보면 나는 중도(中道)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면 하고, 말면 말고. 뭐든 시원시원한 게 좋았다. 그런 태도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론 섬세하게 살피지 못해 제멋대로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든 일도 많았을 것이다. ‘하면 하고, 말면 말고’ 식 사고방식은 급한 성격과도 직결된다. 성격이 급한 나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일과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는 일을 성급하게 구분 짓고서, 한쪽에만 몰두하기 일쑤였다. 선택받은 쪽은 그럭저럭 성과를 이루었으나, 반대로 소외받은 쪽은 늘 방치되어 있었다. 선택과 집중이 중요한 시대라지만, 멋대로 “이건 내 일이 아니니까.”,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하고 등한시했던 순간들에게 미안했다. 어쩌면 내가 무심코 흘려보낸 날들 중에는 내 인생 가장 소중할 수도 있었던 순간들이 섞여 있었을지 모른다. 쌀을 씻어 물을 따라낼 때, 너무 급하게 물을 따라 버리면 멀쩡한 낱알들도 함께 휩쓸려 나가는 것처럼, 인생을 너무 급하게 따라내며 살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후회도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마냥 어리다고만 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 생각해 보면, ‘하면 하고, 말면 말고’ 식 극단적 사고방식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소외되고, 상처받는 사람 없이, 주변과 발을 맞추어 적당한 세기와 속도로 함께 갈 때, 더욱 단단하고,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경우가 많았다. 오랜 시간 천천히 들여다보고, 적당한 세기로 오래 두드린 그릇이 오랜 풍파에도 쉽게 깨지지 않듯이 말이다.








오늘은 조심 조심 한 컵 정도의 물을 주며 가만히 화분을 관찰했다. 정돈된 줄기 사이로 새잎이 돋아나는 중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분도 참 기구한 운명이다. 돌보는 일에는 한 줌 재능도 없는 주인을 만나, 가뭄과 홍수를 며칠 새 모두 겪게 될 줄이야… 극악의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살아낸 그가 기특하고 고맙다.



극락조는 건조하고 마른 기후에 강한 편이나, 가급적 하루에 한 번씩은 물을 듬뿍 주는 것이 좋다고 한다. 특히 하루 중에서도 가능하다면 따뜻한 낮 시간대에 주는 것이 좋다는데, 너무 이른 아침이나 밤에는 찬 기운이 뿌리를 상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서툴고 불안한 초보 식집사*이지만, 초조하진 않다. 천천히 들여다보고 관심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나는 어제보다 나은 집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오래오래 함께 성장해 갈 수 있을 것 같다. 적당한 관심과, 적당한 보폭으로.



* 식집사: '식물'과 '집사'를 합친 신조어로, 식물을 기르는 사람을 뜻함.



우리집 극락조 한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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