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거제도 14번 국도 타고 해금강 우제봉까지

by 겨울딸기

2016년 부산에 내려와 살게 된 이후부터 통영만 대여섯 번 다녀왔다. 거제는 통영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제대로 구경한 적이 없다. 거제는 그저 조선업의 도시고 조선업이 활황일 때는 지나가는 개도 만 원을 물고 다녔다는 둥, 그러나 조선업 불황으로 빈집이 늘어간다는 둥... 뭐 이런 경제, 산업과 관련된 것으로만 떠오르는 도시였다. 약간 지루한 인상만을 가졌던 곳을 어제 갔다. 부산 옆인데 그동안 너무 소원했다는 생각도 들었고 거제도 망산이 그리 높지 않지만 오르는 길도 그렇고 정상에서 바라보는 경관이 아주 좋다는 기사를 남편이 읽고는 한번 가보자 했다.

한 열 시쯤 집에서 출발했다. 두 시간이면 도착한다고 하니 점심 무렵이면 망산을 오르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여지없이 언제나 먼 길 나서면 그랬듯 지름길 두고 먼길로 헤매고 다녔다. 왜 다니던 길을 두고 더 좋다고 착각한 길로 들어서는지. 근데 남편 의도를 이해 못 하는 바도 아니다. 남편은 내비가 알려주는 빠른 길 말고 아름다운 길을 원했던 거다. 결국 오 년 전쯤 출간한 지도책을 폈다. 계산기로 실컷 계산하고 주판알 튕겨 검산하는 옛 어른 얘기가 바로 울 남편이다. 남편이 찾은 길은, 거제에 들어서서 해안을 따라 망산까지 길이었다. 그게 14번 길이다. 그리고 드디어 14번 길에 들어섰다. 처음엔 그냥 보통 길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길이 화려해졌다. 꼭 한라산 옆으로 남북으로 이어진 제주도 길 같다. 나무는 우거지고 새들은 노래하고(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소리가 어찌나 맑고 명랑한지) 바다는 깊고 푸르고... 그동안 거제도를 너무 몰랐구나 미안했다.

길을 마안히 헤맨 탓에 배가 고팠다. 원래 계획은 산 오르다 쉬면서 먹어야지 생각하고 토스트를 만들어갔는데 아무래도 가는 길에 먹어야겠다. 어디에 멈출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바퀴 굴러가는 모든 곳이 퍼펙트 스폿이었다. 와현해수욕장으로 내려갔다. 차 안에 있을 땐 볕이 좋아 더운가 했는데 밖으로 나가니 바람이 차다. 찬 바람에도 바다에서 모래 놀이하는 아이들이 있다. 우리는 모래사장 들어가는 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펴고 앉아서 토스트랑 커피, 토마토를 맛나게 배부르게 먹고 일어났다.


IMG_5098.jpg


가는 내내 감탄을 하는데 갑자기 차들이 양 옆으로 죽 서있고 사람들이 왔다 갔다 했다. 뭐지? 옆을 보니 길 아래로 유채꽃이 빽빽하게 흐드러져 살랑이고 더 아래는 푸른 바다와 숲이다. 와우! 유채꽃 노란빛이 눈부셔서 잠시 눈이 멀었다. 운전을 방해한다.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가 없다. 잊지 않고 마스크 꼼꼼하게 쓰고 나왔다. 봄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꽃은 더 좋은 거구나. 새삼스럽게 심장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아직 갈길이 멀다. 사진 한 장 찍고 출발했다. 발길을 멈춘 사람들도 다들 조심하느라 그런지 마스크 쓰고 서로 멀리 떨어져서 조용히 사진 몇 장 찍고 돌아선다.


282CF9D5-1AC5-49B0-B091-4B675B233BC5.JPG


출발한 뒤에도 눈은 계속 호강한다.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길 가에 입간판이 눈에 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시작이란다. 뭐? 지금까지 길은 뭔데? 근데 괜한 말이 아니다. 길 양쪽으로 숲이 깊다. 천연기념물인 팔색조가 서식한다는 숲이다. 팔색조 노래인지는 모르겠지만 새소리가 동무하자고 계속 따라온다. 손꼽을 만한 아름다운 길이다. 숲길이 끝나고 마을이 나타나는데 그곳 또한 마음을 사로잡는다. 봄 잎이 뽀글뽀글 피어나는 낮은 산을 배경 삼아 주홍빛 지붕을 이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그 아래로 반짝이는 바다다. 결국 한 번 더 차를 세우고 바다랑 뒷 산 한참 바라봤다.


IMG_5130.jpg
IMG_5131.jpg


망산은 어디쯤인가? 과연 우리가 망산을 오를 수 있을까? 거제도는 하루에 돌아볼 수 있는 곳이 절대 아니다. 통영 가는 길목쯤으로 여겼던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착각이었는지. 거제도는 크기도 크지만 길의 오르막 내리막과 굽이치는 모양이 장대하고 씩씩하면서 멋지다. 아기자기한 맛이 아니다. 통영이나 남해 갔을 땐 섬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거제도는 멋지다는 말이 바로 떠오른다. 14번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해금강 표지가 계속 나와서 망산으로 그냥 갈 수가 없겠다. 여기까지 왔는데 해금강을 봐야지. 해금강도 그냥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금강산을 가본 적은 없지만 사진으로 보고 머릿속으로 상상한 금강산은 한반도 최고의 명승지가 아니던가! 결국 해금강 유람선을 탈 수 있는 선착장으로 갔다. 배를 탈 생각은 없었지만 바다나 구경하려고 했는데 둘레길이 세 군데다. 그 안내판을 보면서 망산은 다음에 가기로 결정했다. 부산에서 한 시간 거리이니, 헤매지 않고 멈추지 않고 죽 온다면, 언제든 망산에 오를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은 우선 우제봉을 오르자.

우제봉으로 가는 길은 험하지도 멀지도 않다. 주차장 화장실 옆으로 가는 길이 있고 선착장 뒤로 난 길로 가는 길이 있는데 둘레길이라 다 통한다. 갈 땐 화장실 옆길로 가고 내려올 때 선착장 쪽으로 내려오는 길이 좋겠다. 숲에서 나무 향기가 진하다. 천천히 걸으면서 깊게 숨을 쉬었다. 뱃속 나쁜 기운 다 빼내고 푸른 기운 건강한 기운 들이마셨다. 마음이 편해졌다. 편집증 같은 강박관념 탓에 늘 불안하고 걱정하는 성격인데 잠시나마 머리가 깨끗하게 비어지는 기분이었다. 고마웠다. 나무, 숲, 바람, 향기 모두. 앞서 걷는 남편 뒷모습도 꽤 커 보인다.


IMG_5125.jpg
IMG_5104.jpg
IMG_5105.jpg
IMG_5107.jpg
IMG_5110.jpg
IMG_5124.jpg


우제봉 전망대에 올랐다. 전망대 위에 더 높은 전망대가 있었는데 다가가 보니 군사시설이다. 근처에 얼씬하면 안 될 듯싶어 얼른 내려왔다. 전망대에 오르면 사방을 거의 다 둘러볼 수 있다. 군사시설 초소가 높아 그쪽이 막히긴 했지만 그래도 충분하다. 삼면이어도 눈이 시원해지고 가슴이 펴진다. 우제봉 아래 작은 섬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그 사이로 해 뜨는 모습이 장관인 거 같다. 해 뜨는 사진을 전시해두었는데 그 장면은 누가 찍어도 작품이 될 거 같다. 해금강이다!


IMG_5108.jpg
IMG_5109.jpg
IMG_5117.jpg


망산 가는 건 다음으로 미루고 근처 명사해수욕장까지만 가자고 출발했는데 길을 잘못 들었는지 어떤지 아직도 모르겠는데 어떤 산을 한 바퀴 돌았다. 시작은 평범한 아스팔트 도로였다. 그런데 숲이 깊어지면서 길이 좁아지더니 시멘트 외길이 나오고 또 한동안 비포장길이다. 한쪽은 낭떠러지 숲이고 바다다. 이번엔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무서워서 가슴이 뛰었다. 가슴 졸이며 한참을 올라가니 하늘이 열린 전망대가 나타난다. 산 정상 바로 아래까지 올라온 거 같다. 전망대부터는 쭉 내리막길이다. 길이 좁아 반대편 차를 만나면 아주 조심해서 길을 비켜야 한다. 그렇게 조심하며 길을 내려오니 다시 아스팔트가 나오고 곧 아까 시작했던 길이 나왔다. 산 하나를 차로 둘러본 거다. 다음에 다시 한번 좀 여유 있게 무서움 잊고 가보고 싶다. 전망이 아주 좋다. 그런데 차가 많을 때는 인내심을 발휘해야 하는 곳이다. 산길 따라 내려와서 망산은 잊고 그냥 왔던 길을 거쳐 부산으로 왔다.

처음으로 거제도의 진짜 모습을 본 거 같다. 부산으로 들어와 남항대교 타고 흰여울길로 들어섰는데 영도 둘레길이 왜 이리 소박해 보이던지. 거제도 다녀오기 전에는 한 번도 그런 생각한 적 없었다. 그런데 남편이 툭 던진다. 오늘따라 이 길이 꽤 심심하네. 럭셔리 고급 백화점에서 쇼핑하다 동네 롯데마트 온 느낌이랄까?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더 많다. 한동안 통영은 잊고 거제도만 생각할 거 같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블라디보스토크 시베리아 횡단 열차 일등칸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