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히 닮은 사랑에 대하여
서정주 시인의 시를 한 편 소개하려 한다.
작가의 정치적 성향은 차치하고서라도,
오로지 글만으로 그의 매혹을 떨칠 순 없을 것 같다.
어찌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술은 예술대로, 사람의 삶은 또한 그 삶이 속한 운명대로 내버려두면 어떨까.
내가 이 시를 처음 접한 것은 어느 연애 편지에서였다.
지금은 어디에 사는지 누구와 무엇을 하는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던
어떤 철없던 시절에 누군가와의 어설픈 연애를 하면서 이 시를 편지로 받았었다.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과 꼭 닮아서 '이것은 인연인가, 운명인가' 싶었던 사람을 만나봤을 것이다.
이 시에서는 '한 송이 모란꽃으로 핀 나'와 그런 나를 한 없이 예쁘게 바라봐주는 '한 예쁜 처녀'가 등장한다.
내가 너이고, 그대가 나이고,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은, 그런 묘한 동일화의 순간.
억겁의 시간이 흘러 환생한다면, 세상이 여러 겹의 시간을 갖고 있다면
아마도 '불교적 윤회'사상처럼 현생의 나는 내생의 너로 재탄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제던가 나는 한 송이의 모란꽃으로 피어 있었다
한 예쁜 처녀가 옆에서 나와 마주보고 살았다
그 뒤 어느 날 모란 꽃잎은 떨어져 누워
메말라서 재가 되었다가 곧 흙하고 한세상이되었다
그게 이내 처녀도 죽어서
그 언저리의 흙 속에 묻혔다
그것이 또 억수의 비가 와서 모란꽃이 사위워 된
흙 위의 재들을 강물로 쓸고 내려가던 때,
땅속에 괴어있던 처녀의 피도 따라서 강으로 흘렀다
그래, 그모란꽃 사윈 재가
강물에서
어느 물고기의 배로 들어가
그 혈육에 자리했을 때,
처녀의 피가 흘러가서 된 물살은
그 고기 가까이서 출렁이게 되고,
그 고기를 - 그 좋아서 뛰던 고기를
어느 하늘가의 물새가 와 채어 먹은 뒤엔
처녀도 이내 햇볕을 따라 하늘로 날아올라서
그 새의 날개 곁을 스쳐 다니는 구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 새는 그 뒤 도 어느 날
사냥꾼이 쏜 화살에 맞아서, 구름이 아무리 하늘에 머물게 할래야
머물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기에 어쩔 수 없이 구름은 또
소나기 마음을 내 소나기로 쏟아져서
그 죽은 새를 사 간 집 뜰에 퍼부었다
그랬더니, 그 집 양주가 그 고샛길 저녁상에서 먹어 소화하고,
이어 한 영아를 낳아 양육하고 있기에,뜰에 나간 소나기도
거기 묻힌 모란 씨를 불리어 움트게 하고
그 꽃대를 타고 또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 이 마당에 현생의 모란꽃이 제일 좋게 핀 날,
처녀와 모란꽃은 또 한 번 마주보고 있다만,
허나 벌써 처녀는 모란꽃 속에 있고
전날의 모란꽃이 내가 되어 보고 있는 것이다
모란꽃이 활짝 필 봄이 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이 아름다운 시를 예쁜 편지지에 필사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