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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비령 May 08. 2022

슬픔을 치렁치렁 달고

-최승자 시인의 시를 읽으며.

슬픔을 치렁치렁 달고

내가 운들 무엇이며

내가 안 운들 무엇이냐

해 가고 달 가고

뜨락 앞마당엔

늙으신 처녀처럼

웃고 있는 코스모스들.



-<빈 배처럼 텅 비어> 중에서.



최승자 시인의 시를 읽으면 허무한 감정이 올라왔었다. 그런데 이 시를 읽고 있으니, '슬픔을 치렁치렁 달고' 사는 게 어찌나 우스운 일인지. 헛헛한 미소가 머금어진다.

'내가 운들 무엇이며/ 내가 안 운들 무엇이냐.'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요즘 즐겨보는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20년 전, 아버지의 자살과 자신의 우울증을 첫사랑 앞에서 고백하던 선아(신민아역)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불과 열 네살이었던 어리고 여렸던 사춘기의 딸을 앞에 두고,

시퍼런 바닷 속으로 차를 몰아 죽음을 선택한 그녀의 아버지.

이제 그녀는 담담하게 고백할 수 있다.

"그때 아빠가 내 생각보다 더 많이 힘들었었나봐. 그런데 웃기지? 이런 얘기를 이렇게 쉽게 하다니."

그런 그녀의 말에 동석의 무정하지만 다정함이 숨어 있는 한 마디.

"그럼 슬프고 우울한 걸 이십년을 달고 사냐.그게 더 이상하다 나는."


그래 그렇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변하면, 바람 부는 대로, 그저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될 것이다.

죽을 것 같이 아프고 힘들었던 일들도, 결국은 바람처럼 흩어질 테니까.


이 시는, 마치, 슬픔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많은 청춘들에게,

최승자 시인이 츤데레처럼 건네는  담담한 위로 같은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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