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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비령 Mar 26. 2023

아름답고 쓸모없지만 소소한 것들

좋아하는 드라마를 몇 번이고 되돌려 보는 편이다.

한 장면 장면마다, 배우들의 호흡과 대사의 길이와 행동과 손짓들.

배우들끼리 주고받는 대사의 속도들.

극적인 클라이막스에 이르기 전에 제시된 어떤 복선들.

가장 아름답고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삽입된 적절하고도 아름다운 음악들.

그리고 어떤 결단과 행동이 이루어진 뒤에 남는 반응들.


애정하는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을 세 번째 완주했는데,

이번에 유의깊게 지켜본 캐릭터는 부잣집 도련님 '김희성'역할의 변요한이었다.

시대가 격변하는 와중에,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자 노력하는 그의 모습은

비장하지만 가볍고, 서정적이지만 위엄이 있었다. 

연약한 왕자님같은 외모를 하고, 칼이 아니라 펜으로 자신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 바친 삶. 

처음부터 일관되게 그가 읊었던 가장 인상깊었던 대사는 이것이었다.


"내 원래 이렇게 아름답고 무용하고 빛나는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 멎는 곳에서 죽는 것이 나의 꿈이라면 꿈이오."

                    



생각해 본다.

세상은 의외로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들 천지이다.


4월이면 온 세상을 꽃잔치로 만드는 벚꽃부터

갓 지어진 빵집에서 나오는 고소한 빵냄새,

말벌에서 추출했다는 귀한 꿀을 가득 탄 향기로운 꿀차,

사람 냄새가 좋아 다가와 털을 부비는 고양이의 날선 눈매,

푸르른 연초록 잎들 사이로 가드다랗게 흘러가는 산들바람,

사랑하는 이들을 바라볼 때 지어지는 옅은 미소,

관계의 어려움을 한 방에 풀어버리는 친구의 웃음소리,

가볍고 어이없지만 끝내 맴도는 아저씨들의 유머까지.


달과 별은 모르겠다.

미세먼지가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으니.

그럼에도 둥글게 가득찬 환한 보름달과 까맣고 고요한 시골 산 중에서 빛나는 별을 발견한다면

그 또한 지극히 아름답겠지.

오죽하면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라는 시까지 있을까. 


세상에 '김희성' 같은 남자가 있다면

너무나 아름다울 것 같다.


이렇게 헛된 희망을 꿈꾸며 상상하는 것 또한

아름답고 무용한 욕망이겠으나,

오늘은 또 한번 인생에 속아주며

금방 사라지고 말 아름다운 꽃들의 향연을 구경하러 한 걸음 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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