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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비령 May 01. 2023

시를 삼키는 마음

아직도 내 안에 있는 뜨거운 무언가를 밝히며

오랜만에 시집을 펼쳤다

마음이 세상에 찌들어져 사악하고 복잡해질 때는

감히 시집이라는 성스러운 물건을 들춰보지 못한다.

마치 시집을 여는 순간

진흙 덩어리인 세상과는 별개의

무지개빛 다리를 건너는 느낌이 들어서

현실도피, 혹은 현실감각이 무뎌진 채로

삶에서 도망가는 죄책감마저 들었다.


시 따위야 한량들이나 배부른 자들이

유유자적 즐기는 것 아니냐고

숨어있는 지킬박사가 외치는 것마냥

어떤 날들은 아주 오래도록 시집을 멀리했다.


그러나 이토록 아름다운 오월에

분홍빛 자주빛 다홍빛 철쭉이 흐드러지게 온 땅을 잠식하고

손톱 위에도 작은 꽃잎 하나 올리고 싶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정신이 몽롱해지는 계절에는


어쩔 수 없이 시와 다시 마주하는 순간이 온다.

그것은 자석 같은 끌림이어서

운명이 이끄는 대로

또다시

'시가 있어 다행이다.

삶의 꽃 같은 그 순간들

처절히 고통스럽지만

또 은근히 아름답고 잔잔한 한낮의 비애가

시 속에 녹아 있구나'

느끼고 만다.



이병률 시인의 매혹적인 글들.


'시를 어떨 때 쓰느냐 물으시면'

그리고

기억하고 싶은 시

'넉넉한 쓸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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