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몸에 맞는 옷 - 휴직일기2

- 옷장정리를 하다가.

by 은비령

휴직 2개월차. 벌써 잔인한 4월도 끝물이다. 달콤한 백일 간의 휴가를 얻은 뒤, 여기저기 신나게 여행도 다니고, 배우고 싶었던 골프도 아주 쪼~끔 배웠다. 나름대로 아이 뒷바라지도 열심히 했고, 직장에 다니느라 엉망이던 집안 구석구석 정리도 조금 했다. 특히 옷방은 아주 엉망 그 자체더라.


옷 정리에 관해 한 마디 하자면,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다. 뭐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내 몸의 정확한 치수도 모르는 채 그냥 대충~ 생각없이 사들인 쓸데 없는 비슷한 옷들이 너무 많더라. 그런데 정리를 하면서 한 벌 한 벌 입어보고, 만져보니, 언제 내가 이런 취향이었나 싶었다.


이사를 하고 처음으로 드레스룸을 가진 뒤로, 내 옷들이 공기 중에 찬연히 드러난 민낯을 보게 됐다. 색감, 길이, 느낌 등등이 햇빛에 비추어 '나 좀 입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드레스룸에 정리할 때만 신나게 옷가게 느낌으로, 나름 색깔별, 계절별로 걸어놓고서는 막상 주로 입는 옷들은 '걸려 있는 제대로 된 옷'들이 아니라 아무렇게나 접었다가 대충 꾸겨놓고 다시 꺼내입어도 티안나는 '바닥에 널부러진 편안한 옷'들이더라. 드레스룸 정리한다고 원목 옷걸이까지 새로 바꿔놓은 게 무색하다. 예쁜 원피스나 자켓들은 손도 안가고 입지도 안았었는데, 무슨 욕심으로 몇 년을 이고지고 이사를 다닌건지.


저 옷들은 걸어두려고 산건가? 한 동안 화려하고 우아한 원피스들을 한참 쳐다보다가, 저 옷들의 주인이 나였구나를 새삼 깨닫는다. 대체 나란 인간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생활을 해야 내 몸이 어색하지 않은 걸까.지금 내 생활에 가장 어울리는 옷은 어떤 차림인걸까. 어떻게 입어야 백수도 우아하고, 세련되고, 없어보이지 않는 건지.


사실 나에게도 샤랄라 원피스만 입고, 일주일에 서너번은 치마만 입던 '리즈 시절'이 있었다. 요즘도 예쁘게 차려입고 아이보리색, 베이지색 메리제인 구두를 신고, 작은 손가방을 든 아가씨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간다. 꼭 그녀들이 부럽다거나해서가 아니라, 그냥 봄꽃이 예뻐 쳐다보지 않을 수 없듯, 그 싱그러움이 눈부셔서 눈길이 간다. 꽃이 피었다 지는 짧디 짧은 봄을 지내면서, 인생에서 아름다운 시절도 이렇게 훌쩍 가버리는 구나를 새삼 느끼게 된다.


뭐, 요즘은 4,50대 아줌마들도 자기 관리에 충실하시고, 필라테스, pt 등으로 몸관리를 하며 바디 프로필도 찍는 시대니까. 뒷모습만 봐서는 나이를 가늠하기도 힘들긴 하지만, 어쨌든, 내 경우를 빌어 얘기해보자면, 이제 '원피스의 시대'는 한물 간 것 같다. 샤랄라했던 여성성의 시대가 끝났음을 애써 인정하지 않고 싶어서, 저 예쁜 옷들을 그렇게 싸짊어지고 다녔나보다.


작아진 아이옷들은 그때 그때 잘도 기부하면서, 왜 입을 일도 없는 블라우스, 원피스, 스커트, 레이스 니트 등... 이런 것들을 버리지 못했었는지. 사실 아직도 "지금 당장 버려. 누굴 주든지."하면 "언제 입을 날이 있겠지. 저거 살 때 얼마나 고르고 고른건데. " 이런 생각이 먼저 든다.


옷장만 보더라도, 나의 지나간 세월이 보인다. 하나의 옷장은 한 사람의 역사라고 했던가. 그 시절에는 그렇게 영원할 것 같고,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나의 취향과 나의 신체 사이즈, 그리고 생활 패턴이 너무나 달라져있다. 코로나 시국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점점 더 사람 만날 일은 줄어들고, 굳이 꾸미고 만나지도 않는다.

요즘 내가 가장 많이 입는 옷은 유행한다는 배기핏 츄리닝과 무채색의 맨투맨이나 후드티, 바람막이 정도다. 휴직자의 백수 패션이랄까. 조금 멋을 낸 날은 스카프에 블라우스, 청바지나 슬렉스 정도를 입긴하지만, 치마는 도저히 손이 잘 안간다. 그렇다면 스타킹들과 구두들도 다 처분해야하나. 휴.


백수가 되어보니, 옷장도 같이 쉬는 느낌이다. 뭔가 차려입고 당당하게 나갈 곳이 있다는 것도 참 좋은 일이구나. 하다못해 아이 등하원룩이라도 조금더 신경써야겠다. 옷장 속 저 옷들이 참담한 최후를 맞기 전에, 한번쯤은 더 예뻐해줘야지. 그러려면 저 옷들에 어울릴 몸부터 만드는 게 우선이겠다. 샤랄라한 몸 만들기를 위하여 파이팅!!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여행의 즐거움은 가격에 비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