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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즐거움은 가격에 비례하지 않는다.

호텔에서의 아침과 밤 시간을 보내며.

by 은비령

나는 지금 집에서 500키로가량 떨어진 제주 공항 근처 어느 호텔에 묵고 있다. 그리고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비즈니스 호텔에서 이른 아침,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잠시 일을 내려놓고, 휴식기를 보내면서, 쉴 새 없이 여행을 다녔다. 집 근처의 공원부터, 경치 좋은 산이나 강, 바닷가 근처에서의 캠핑, 그리고 비행기나 배를 탄 장거리 여행까지. 제주도 올해 들어 두 번째이다. 올해의 목표는 계절마다 제주를 찾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정점을 찍고 요즘은 다시 조금씩 여행 수요가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아마 올 여름에는 공항 국제선이 예전보다 더 붐비지 않을까. 그동안 못했던 해외여행을 가려는 수요들이 폭발하면서 당분간 어딜가든 사람에 치이지 않을까 오히려 걱정이다. 어쨌든 각설하고.


가끔 사람들이 묻는다. 왜 그렇게 여행을 계속 다니느냐고. 이제 더이상 볼 것도 없지 않느냐고.

예전에는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 여행과 관광을 구분하지 못하고, 가이드나 따라다니거나, 남들이 블로그에 써놓은 일정을 그대로 복사한듯 따라 다니며 눈에 뭔가를 채워넣기 급급했었다.

그런데 나름 여행의 하수는 벗어나지 않았을까 스스로 자평하고 있는 지금의 상태에서는, 적어도 나만의 방식으로 하는 것이 진짜 여행이라는 것은 알겠다. '여행의 고수'의 기준은 뭘까? 여행을 다니는 횟수, 혹은 위험을 무릎쓰는 정도, 정보를 찾는 능력, 돌발 상황에 당황하지 않는 임기응변력과 센스. 낯설거나 불편한 것을 견디는 체력과 예민하지 않은 적응력.. 등등 많은 기준이 있겠지만, 만약 내가 저 질문을 받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집과 다른 어느 곳에서든 아침과 밤 시간을 즐길 줄 알면 여행의 고수가 아닐까요."라고.



내게 있어 여행에서 숙박은 정말로 중요하다. 숙소에서 머무르며 오롯한 쉼을 갖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홀로 훌쩍 떠나던 시절에는 1인 도미토리도 많이 가봤고 가성비 위주로 다녔지만, 지금은 주로 아이를 동반하기 때문에 편안한 잠자리가 있는 숙소를 위해 그만한 값을 지불하고라도 숙소를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다.

'키즈'라는 이름을 붙인 숙소들은 대게 가격들이 꽤 비싼 편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런 숙소에 절대 가지 않는다. 캐릭터로 치장된 채, 자연을 그대로 느낄 수 없는 인위적인 장식들로 편안한 쉼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여행지에 가서까지 그런 플라스틱 장난감들이나 영상물에 등장하는 캐릭터들로 내 아이의 시야를 좁혀야하는 걸까. 그런 인위적인 것들보다는 해당 여행지의 느낌이 나는, 정갈하고 편안한 침구가 있는 숙소가 제일 좋은 것 같다.




사실 숙소의 청결함이나 편리함은 가격에 비례하는 면이 어느 정도 있지만,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여행에서의 즐거움이 반드시 가격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싶어서였다.

오늘 내가 머무른 숙소는 비싸지도 않고, 멋진 풍경 속에 위치하지도 않았다. 창문을 열면 옆 건물에서 흘러오는 담배 연기에, 옆 방에서 밤 늦게까지 떠드는 소음이 그대로 들린다.


그렇지만 내가 글을 쓰기에 충분히 편안한 공간이 있고, 집에서는 여러가지 핑계로 안 읽던 로맨스 소설을 읽을 만한 작은 조명도 있다. 집에서는 왜 책이 잘 읽히지 않는걸까? 나의 모든 것이 있는 공간인데.. 유명 여행작가가 여행이란, 편안하고 아늑한 집을 벗어나 값비싼 요금을 지불하고 고생하는 것이라 했다던데.. 그말이 너무나 공감된다.


내가 느끼는 여행의 큰 즐거움 중 하나는, 집이 아닌 불편한 어떤 미지의 공간에서 새롭게 적응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늘 있던 공간에서라면 늘 비슷하게 행동했을 나의 일상 패턴이 여행지에서는 새롭게 변화한다. 새롭고 낯선 공간에 맞춰서 그때 그때 적응해나가고, 사소한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어디에서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준다. 또, 생활을 하면서 꼭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고, 좋은 삶, 편안한 삶의 조건들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생각하게 한다.



어젯 밤에는 호텔 근처를 유유자적 산책하다가 작은 공원을 발견했다. 도심 속 공원에서 늦은 밤 농구를 하고 배드민턴을 치거나 담소를 나누며 근처 식당들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그 밤 공원에 켜진 가로등의 따스한 불빛과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든든한 나무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오늘 하룻밤 묶을 따뜻한 공간과 맥주 한 잔. 그리고 읽다 잠들 로맨스 소설이나 추리소설 한 권. 잔잔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스피커. 그거면 되겠다, 충분히 행복하다. 그런 생각.


(이야기가 좀 옆으로 샌 것 같지만 ^^ )

여튼, 오늘의 결론은 이거다. 굳이 멋지고 값비싼 호텔에 머무르지 않아도, 남들 다 가는 여행 스팟을 찍으며 분주하게 관광을 다니지 않더라도. 나는 지금 집 밖의 새로운 공간에서 아무 고민 없이, 휴식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는 거. 그리고 숙소의 여건이 좋든 나쁘든, 그 나름대로 적응하는 즐거움이 있고, 때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공간에서 진정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거. 그래서, 여행의 즐거움은 이른 아침과 늦은 밤을 보내는 충만함에 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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