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과 폭우로 얼룩진, '잔인한 여름'을 맞이하여 나는 지금 내 나라를 떠나 한 달 살이 중이다.
여행은 자주 다닌 편이지만, 오롯이 한 달(정확히는 3주가량)을 머무르고 살아보기 위해 떠나온 것은 처음이다. 오기 전에 별다른 기대는 없었지만, 막상 육체가 이곳에 분리되어 있으니, 그간의 상념이나 복잡했던 일들이 조금은 잊혀지고, 새로운 곳에서의 적응으로 하루 하루를 기대하며 보내고 있다.
어제는 이곳 조호바루에서 가깝다는 유명한 여행지 싱가포르에 다녀왔다.
국경을 통과하는 데 기차로는 불과 5분, 버스로도 몇 정거장 안 된다고 해서
대책도 없이(예매도 안 하고) 무작정 센트럴 스테이션을 찾았는데, 아니다 다를까,
무대책의 엄마 때문에 아들이 또 고생을 한다 ㅠㅠ
기차표는 이미 매진이라서,, 버스를 타기로 하고 이동을 하는데 입국 심사가 이리 전쟁일 줄이야.
관광객 뿐만 아니라, 싱가포르에 삶에 터전이 있는 말레이시아 내국인들의 수도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어린 자녀 동반인 나는 '노약자 우선' 라인에 속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더 엄격한 입국심사를 받아야했다. 내 옆에 아이만 넷인 서양인 엄마아빠가 어린이 정보를 하나하나 온라인 입국심사로 등록하며 긴 시간을 간이 의자에서 인터넷과 싸움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애틋함이 절로 들더라.
(미성년 자녀를 동반하면 자동 입국 심사가 안 되기 때문)
어찌됐든, 고단한 입국심사의 터널을 무사히 건너고, 도착한 싱가포르는 별천지였다.
바로 옆의 나라와 확연히 비교되는 금융 허브 국가로서의 위상.
말레이시아도 매력적인 나라지만, 싱가포르의 도시적인 깔끔함과 매트로 시티임에도 불구하고 잘 가꿔진 정원 같은 자연환경을 보고 있노라니, 정말 입이 벌어졌다.
아이도 같은 마음인지, 싱가포르에서 살고싶다는 말까지 했다.
몇 년 전 방문했을 때보다 더 깔끔, 쾌적, 세련되어진 모습이었다.
마치 미래 도시의 모범적인 조감도를 그대로 현실로 옮겨놓은 것 같달까.
울창한 야자수와 유유히 흐르는 강변 옆을 여유롭게 조깅하는 사람들.
여러 피부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누구도 서로를 편가르지 않는 듯한 모습이 평화로웠다.
싱가포르에서 도시 관광을 하며, 꿈같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렵게 예매했던 리턴 기차표 시간을 넘기고 말았다.
또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입국 심사 전쟁을 늦은 밤 아이와 겪어야한다니,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역시나 아이의 입국심사는 어른보다 쉽지 않았고, 키 때문에 얼굴 인식이 어려워서
따로 직원 앞에서 다시 입국심사를 받고, 여러 질문을 받았다.
'여기 왜 왔니, 누구랑 왔니, 너희 둘뿐이니, 어디에 머무르니, 돌아가는 비행기는 언제니, 숙소에는 어떻게 갈거니...'등등
마지막에 '그랩으로 갈 거에요.'라고 하니, 입국심사 직원이 심드렁한 것 같으나 친절하게 "조심히 가세요"
하는데 왠지 또 울컥..^^; 츤데레 같은 걱정에 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나서, 자정이 다 되어 그랩을 호출했는데, 늦은 시간이 무색하게, 역 앞에는 많은 인파가 있었다.
대부분 20,30대 젊은 이들이었지만, 역시나 이렇게 더운 나라는 밤도 짧구나 싶어서 이국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우리를 맞이한 그랩 운전사는 전형적으로 모범적으로 생긴 젊은 이였다.
낡은 소형차로 이런 늦은 시간도 마다하고 투잡을 뛰고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젊은 나이에 투잡을 뛰어가며 고생하는 그의 인생도 참 안쓰러워 보였다.
운전 실력은 꽤 출중했다. 밤이라 안 막혀서 인지, 나름 신도시라 도로가 넓어서인지,
생각보다 금방 숙소까지 올 수 있었고, 요금도 얼마 안 나왔다.
오전에 센트럴 역으로 갈 때만 해도, 밤에 나온 요금의 1.5배 정도의 금액이 나왔었고, 당시 노련해보이는 중년 기사님은 거스름 돈도 안 주고 그 돈을 킵했었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저렴하게 돌아온 셈이다.
차에서 내리면서 계산을 하려는데, 잔돈이 없어서 혹시 잔돈 있나요라고 물었더니,
어색해하며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사진과 같이 1원 단위까지 거스름돈을 정직하게 돌려주었다.
사실 작은 동전 단위는 구하기도 쓰기도 어렵고, 팁문화도 있으니 그냥 왠만하면 백원, 십원 단위의 돈은 거슬러 받을 생각도 안 했는데, 이렇게 받고 보니,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렵게 돈을 벌기 위해 이렇게 깊은 밤까지 묵묵히 일하는 젊은 이에게 너무 냉정한 손님이 되었던 건 아닐까.
구깃구깃한 돈을 보고 있노라니, 누군가의 손에서 손으로 옮겨져, 또는 어떤 주머니 속에서 몇날 며칠을 잠자고 있다가 나에게 돌아온 이 돈이, 누군가의 삶을 버티게 할 생명줄이겠구나 싶었다.
돈은 그저 종이일 뿐이지만, 그것을 지녔던 사람의 고된 삶이 느껴진달까.
갑자기 또 마음이 먹먹해진다. 착하디 착한 말레이시아 젊은 운전사의 양심을 본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