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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비령 May 12. 2024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기형도 시인의 삶을 추모하며. 

삶이 어려워지는 순간마다, 좋아하는 시인의 고뇌를 떠올리려 한다.

누구보다 깊이 사유하고, 많은 고뇌를 통해 삶을 시로 승화시켰을 문학가들의 

슬프고 보잘 것 없지만, 두고두고 회자되는 그 짧은 삶의 흔적들을 사랑한다.

결코 평범하지 않았지만, 고뇌 속에 삶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님들.

비록 살아 생전에는 누추했을지라도, 그 누추한 삶의 경험이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한 줄기 위로가 되곤한다.

오늘은 작가님의 시 중에 끝구절이 인상깊었던 시를 한 편 필사해본다.

제목은 <오래된 서적>이다.


<오래된 서적>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 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서표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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