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의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라는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이 시의 교과서적 주제는 '상처를 극복한 내면의 아름다움' 또는 '서로 상처를 위로하고 더불어 사는 삶'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런데 어디 인생이 교과서 같던가?
사실 말이지, 상처 많은 인생은 피하고 싶고, 상처를 겪은 이들끼리 모여있으면 우울할 것도 같다.
예를 들어, 외국 드라마의 알코올 중독자들의 치유 모임을 떠올려보자.
모임에서 서로 자신의 알코올 중독 증상의 회복기를 공유하지만,
실상 듣고 있다보면 하찮고 찌질해 보이는 데다가, 자기 속살을 여과 없이 꺼내놓는다는 게 어쩌면 고문일 수도 있지 않나? 그리고 막상 그런 모임에서 '잘 했어요'라고 서로 박수쳐주며, 일상에서 진솔하게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아마 그런 모임에서 마주친 사이는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사이가 되는 건 아닐까.
왜 상처를 공유해야 하나?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치유하지 않고 덮어둔 상처는 언젠가 덧나기 때문이라서?
왜 아픈 기억을 잊으면 안 되는 건가?
적어도, 지금을 살아내는 일상이 평화롭다면 굳이 아팠던 과거를 떠올릴 필요가 없지 않나?
그렇지만, 시인의 이야기에 공감은 한다.
'상처 많은 꽃들이 가장 향기롭다.'
그리고 상처 받은 사람들은, 풀잎같이, 꽃잎같이 마음이 고운 이들이 많다.
마음이 여리고 고와서, 착하고 다정해서,
그런 이들을 쉽게 여기는 나쁜 사람들이 너무 쉽게 상처를 주고 만다.
마치 연인 관계에서 '나쁜 남자'가 가장 끌리듯이.
착하기만 한 좋은 상대방은 쉽기 때문에, 그 관계에서 내가 갑이 되듯이.
가능하다면 상처 없는 하루를 살아내고 싶다.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고.
누구에게도 상처주지 않고.
그러나 어느 날인가 아주 깊은 상처를 겪게 된다면
그 상처에 대해 꼬치 꼬치 캐묻지 않고
그윽히 바라보며, 말없이 연고를 발라주는
듬직하고 의지되는 이를 옆에 두고 싶다.
상처많은 풀잎과 꽃잎 같이 고운 사람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들의 곱고 아름답고 착한 마음을 알아차려주는
또 다른 고운 이들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 고운 이들이 함께 앉아, 물들어 가는 저녁놀을 바라보고 살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꽤 아름다운 삶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