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시작은 아주 우연한 데서 시작한다.
굳이 거창하게 '외국에서 한 달을 살아봐야지. 그건 내가 죽기 전에 해내야만 하는 버킷리스트니까!'
이런 생각으로 시작된 체계적인 계획은 결단코 아니었다.
여느 'p' 성향을 가진 분들처럼, 나 역시 잠 못들던 어느 밤, 무계획적이고 충동적인 생각으로
세부행 티켓을 끊었더랬다.
이왕 가는 거니까 그래도 2주는 있어봐야지?
아니 어차피 갈 거면 한 달로 가면, 아들 녀석 어학원도 등록하고 나는 집안 일에서 해방되어
영어 공부도 하고, 가끔 운동도 배우면서, 열대과일 실컷 먹고 신선 놀음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낙관적인 상상만으로 한 여름 밤의 꿈에 젖었더랬다.
방학이란 달콤한 보상이 있어서, 교사로서 살아가는 것이 감사하다.
그 덕에 한 달 살기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일 테니..
그런데 원래 여름 방학은 좀 짧다. 방학을 통째로 다 써도 3주 정도 되는 시간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아이들 겨울 방학에 맞춰서 4주, 6주 어학캠프도 오고 하신다고 한다.
때마침 필리핀은 우리의 1,2월이 건기라 여행하기 가장 좋기도 하다.
하지만 그때까지 우리의 계획을 미룰 순 없었다.
게다가 어영부영 학기 중에 바쁜 시험 일정, 학기말 일정을 소화해내다보니
비행기표 환불 기간도 지나버렸다.
그냥 지금 가지 뭐.
사실 숙소도 1주밖에 예약이 안되어 있었고, 별다른 여행 계획도 투어 일정도, 심지어 어학원도 결정되지 않았다. 뒤늦게 단기 등록이라도 알아보려했더니, 유명한 어학원들은 등록비 자체가 수십만원인 터라, 1-2주 등록하자고 등록비까지 내기에는 다소 부담스럽더라.
그럼 뭐, 세부 어느 지역에서 지낼 건데? 그 지역을 고집해야할 이유는 있어? 스스로에게 물었다.
처음 세부라는 곳에 가보기로 마음 먹은 그 순간의 나에게 다시 진지하게 물어봐야했다.
나조차 내 마음을 정확히 모르겠으니, 진지하게 눈을 맞추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시간을 들여 충분히 생각할 기회를 주어야 했다.
'음... 나는 말야... 필리핀을 잘 모르지만,, 왠지 그 곳에 가면 새하얀 백사장과 에메랄드 빛 바다가 있을 것 같아. 열대과일도 흔하겠지. 시장도 궁금하고, 거기 사는 분들의 일상도 궁금해. 때로는 호화를 누릴 고급 리조트에도 있어보고 싶고, 또 때로는 삶의 현장에서 현지인과 부대껴보고도 싶어. 그곳에서는 어떤 다른 일상들이 펼쳐지고 있을지 궁금해! 거기다가 보너스로 내 집과 다른 분위기의 숙소에서 요리도 해보고 싶어. 단기로 원데이 클래스 같은 건 없을까? 얼핏 들어보니 다이빙?도 많이 한다던데, 나같은 수영 초보도 도전할 수 있을까? 요즘 하루가 다르게 관절이 안좋은데, 더 늙기 전에 뭐라도 해보고 싶어...'
뭐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한 마디로 정리는 안 되는 잡다한 상상들 속에서 나는 푸른 바다에서 다이빙도 하고 있었고, 현지인들의 마켓에서 산 열대 과일, 야채로 직접 요리도 해보고 있었다. 어느 날은 원데이 클래스로 요가도 하고, 서툰 영어를 써가며 대중교통도 타보고, 그저 동네 어귀를 어슬렁 거리고도 있었다.
그래 뭐. 가자. 가서 보면 뭐라도 할 일이 생기겠지.
아이까지 대동한 채로 일주일 숙소만 예약한 채로 비행기에 올랐다.
다만, 전보다는 조금더 짐싸는 시간이 줄었고, 23kg 수화물 중량에 맞춰서 꼭 필요한 것만 담기 위해 노력했다. 다이소에서 산 공병에 간장, 참기름, 고춧가루, 설탕, 식초, 쌈장도 야무지게 싸고, 팩고추장, 캔이 아닌 1회용 포장된 참치, 스팸, 비비고에서 나온 각종 밑반찬들, 씻어 나와 진공포장된 쌀들, 컵라면, 카레, 짜장, 심지어 동결건조된 북어국까지......
옷이야 버려도 될 것들로 엄선해서 땀에 젖어도 금방 마르고, 그대로 입고 수영해도 될만한 기능성 옷들, 반바지들, 그리고 혹시나 예쁘게 차려입고 싶을 날을 대비해 원피스 두어벌, 긴바지 , 냉방이 센 실내에 머무를 것을 대비한 얇은 겉옷 몇 벌..
나와 함께해줄 전자제품 친구들,, 13인치 맥북, 아이용 태블릿, 심심풀이용 닌텐도.. 등을 백팩에 쌌다.
이미 24인치 캐리어 2개, 백팩 2개였으나, 공항 서점에서 아이용 책까지 추가 구입해서 책들도 5권 정도 쌌다
막상 해외에 장기간 있으려니 괜히 한국 책을 읽고 싶어지더라. 더구나 학령기 자녀도 있으니, 알뜰하게 문제집도 챙겼다. 한국사, 수학 책... 아이는 거기서도 공부를 해야하냐며 울상을 지었지만, 그래도 학원은 안 다녀도 된다고 설득했다. ^^;
뭐, 이럭저럭 집을 싸들고, 일주일 지낼 숙소도 있으니. 게다가 이번에는 처음으로 로밍도 해서,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구글맵이 안터진다거나 연락이 힘들다던가 하는 불상사도 없을 테니 아주 든든했다.
그렇게, 세부 땅에 도착했다. 그게 벌써 5일 전이다.
그새 나는 숙소 체류 기간을 연장했고, (심지어 착한 집주인이 하루는 공짜로 머무르게 할인도 해줬다 ㅎㅎ), 각종 투어들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현지에서 대학생 튜터도 구해 2시간씩 영어 수업도 하고 있다.
필리핀에서 단 5일을 보냈을 뿐인, 아들이 하는 말....
'엄마, 여기도 그럭저럭 살만 한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너무 좋은데요!
야외에서 수영도 매일 하고, 망고도 맛있고, 사람들도 다 착해보여요! '
'그래.. 어디든 못 살 건 없단다. 조금의 불편함과 차이만 감수하면, 평생 머무를 것도 아닌데, 우리 겁내지 말자.'
'내일은 시내버스 타기 도전이야! 그리고 새로운 체육관 오픈한다니까 구경도 가볼까? '
'저기 몇 블럭 뒤의 마트에 맹인 마사지사가 있다는데, 그렇게 손맛이 좋으시대.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
'엄마, 야시장은 자주 가면 안 돼요. 매일 가면 특별하지 않으니까 아껴서 가요.!'
'엄마, 우리 튜터가 숙제는 없대요! 너무 착하신대요!'
'엄마, 우리 동네에도 이런 망고 쉐이크 가게가 있으면 내가 매일 갈거에요! 한국에 소개하면 안 돼요?'
ㅋㅋ 이제는 사업 아이템까지 발굴하고 있다.
아마 단기 여행으로는 이런 일상을 겪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매일 크게 하는 일은 없지만, 그냥 동네 슈퍼 구경하고 밥 해먹고, 가끔 마사지도 받고, 새로운 장소에 가는 것을 도전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한 뼘 더 성장한 느낌이다.
겁도 없어졌고, 도전 정신도 높아졌으며, 나름 영어 울렁증도 조금씩 극복해가고 있다.
길거리에 사람 구경, 차 구경, 꽃과 나무 구경, 경찰 아저씨 구경, 공원 구경... 등등 모든 것이 새롭다.
한국에서의 일상과 고민들을 잠시나마 잊고, 이렇게 새로운 것에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 낯선 곳에서의 한 달 살기가 주는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남은 날들을 좀더 다채로운 색깔들로 꾸며보고 싶다.
다시 아이가 된 것처럼 설렌다.
잘 왔다, 필리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