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비령 Oct 24. 2022

고양이의 휴식 시간

한낮의 달콤함에 대하여.

어제저녁부터 손목을 움직일 때마다 찌릿찌릿 아파왔다.

캠핑 후유증인지, 그만큼 타자기를 많이 쳐서 인지, 집안일을 많이 해서인지.

손목 보호대를 착용하고 조심조심 일을 하다가, 문득 볼펜으로 사인조차 하기 힘들어지기에,

급하게 병 외출을 달고 직장 근처 병원을 찾았다.

전에 한 번 진료를 받았어서인지, 의사 선생님은 "또 오셨네요?" 하시면서

금방 약 처방을 해주시고, 아프면 주사를 맞아보자고 하신다.

'x-ray를 찍어야 하나, 사람이 많으면 어쩌지, 오른손인데 만약 깁스를 하면 운전은 어떻게 하지?' 등등

수많은 걱정을 한 사실이 무색해진다.

너무 싱겁게 끝난 진료 덕에, 터덜터덜 발을 차며 천천히 걷다가, 병원 옆에 있는 편의점에서 즐겨먹던 10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하나 물고, 주차장으로 걸어왔다.

그런데 주차장 바로 뒤편에 아주 예쁜 단풍나무가 있고, 그 아래 아주 편안해 보이는 벤치에 햇살이 가득 비치고 있었다. 이 여유를 놓칠 수 없어서, 공원에 잠시 머무르기로 했다.

한 손에는 약봉지를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아이처럼 공원을 느릿느릿 걷다가,

벤치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늘어지게 누워있는 고양이를 발견했다.


우와~~~ 근래에 본 풍경 중에 가장 황홀한 광경이었다.

그래, 녀석도 쉬어야지. 너도 햇빛이 좋고 흘러가는 가을이 아쉬운가 보구나.

근데 너, 설마 매일 이렇게 한낮의 여유를 즐기며 사는 거니?

집은 어딘지, 아마도 야생 고양이 같았는데, 이 녀석 말고도 두어 녀석이 더 어슬렁 거리는 게 보였다.

너희들은 다 가졌구나~~ 세금 안 내도 언제든 옮길 자유가 있는 거리의 집과, 원한다면 아무 때나 드러누워 쉴 수 있는 시간적 자유와 고민 없이 그저 햇빛과 바람을 즐기며 쉴 여유.

고양이의 달콤한 휴식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장희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


꽃과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 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이장희, 봄은 고양이로다.-

*************************************************************************************


시 속 '봄'이라는 단어를 '가을'로 바꾸어도 전혀 어색할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단어를 바꿔 패러디해보았다.



구름과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가을빛이 어리 우도다


에메랄드빛 구슬 같이 빛나는 고양이의 눈에

가을의 형형색색 물감이 비치도다


앙칼지게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도도한 단풍나무의 자태가 떠돌아라


복슬복슬 풍성한 고양이의 수염에

한낮의 한가함이 흐르도다..



마음을 몽실몽실하게 해 주는, 시가 좋다.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자태를 뽐내는, 가을도 어여쁘다.
그리고 시를 절로 떠올리게 하는 고요하고 도도한 고양이, 너는 더 좋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