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논리가 아닌 감정의 동물
올 초 장기근속상을 받으면서 이제 이 회사에서 나의 근무년수는 만 10년이 넘게 되었다. 경영기획 파트였던 첫 번째 부서에서는 사원들과 회사 시스템을 위해 일했다면, 현재 부서에서는 고객을 위해 일한다.
동료와 고객은 나를 대하는 방식이 다르지만 대화 후 내 마음이 평안한가를 따져보면 사실 대화의 본질은 같다. 일하면서 대화가 실패했다고 느낄 때는 퇴근 후나 휴일에도 그 일로 마음이 쓰이고 언짢을 때이다.
2일 전에 있었던 일이다.
A는 곧 새로 입주할 회사의 직원으로서 사무실의 시설 및 설비를 나와 함께 둘러보며 궁금한 것을 질문하고 원하는 것을 요구했다. 그는 우리 회사 임대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을 끝없이 당당하게 요구했다.
(우리 회사는 소유 건물에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임대를 주는데, 나는 임대 상담부터 기업 입주, 청구서 발행, 퇴거까지 담당한다.)
A : 여기 에어컨 기종이 너무 오래돼서 기계에 이상이 없다고 해도 바꿔야 할 거 같아요
나 : 네, 이해는 합니다. 기계가 좀 노후하기는 했죠. 지난번에 제안해 주신 것 검토해 보고 알려드릴게요
A : 에어컨 문제에 굉장히 민감하시네요.
나: 이 호실만 에어컨을 변경해 드리면 이 층의 다른 입주사, 윗 층까지도 기기를 변경해 드려야 하는 문제가 생기...
A : (말 자르며 단호하게) 저희는 그런 거엔 관심 없구요. 알 필요 없구요.
나: (애써 웃으며) 업체의 입장을 저에게 말씀하시듯이 저도 회사의 입장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검토해 보겠다고 말씀드렸구요.
나 : (벌써 시설을 보러 온 게 4번째인데) 오늘 마지막으로 둘러보시고 복구가 필요한 점 말씀해 주세요.
A : (정색하며) 마지막이라니요? 저희가 올 때마다 당연히 같이 봐주셔야죠.
A : 저희 계약 그냥 8월 1일부터 하게 해 주시면 안 되나요? (규정상 임대차 계약 개시일 기한이 7월 11일임) 그냥 좀 해주세요~ 8월 1일부터로!
나 : 제가 융통을 발휘하면 좋겠지만 이 부분은 규정상 명시되어 있고 모든 업체 똑같이 적용하는 부분이라 어렵습니다. 이미 계약 개시 통보일보다 한 달을 늦추신 상태이기도 하구요. 그렇게 연기하는 업체도 거의 없어요.
<미팅 이후 A에게 걸려온 전화>
A : 선생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중간에서 고생 많으시죠? 원래 감정노동이 제일 힘든 일인데...
나 : (뜨악하여 할 말 잃음) 그러게요~ 제 말도 끝까지 좀 들어주시면 좋을 텐데요.
A : 제가 마음이 급해서요. 죄송합니다, 하하. C-E호도 공실이라고 하셨죠? 저희 A-C호가 아니라 C-E호를 임차하려고요. 대표님이 용단을 내리셨습니다.
나 : (A-C호에 대한 입주상담을 세 달 전부터 했고, 입주 심의도 그 호수로 진행되었으며, 지금까지 그 호수에 대한 미팅을 4번을 가졌는데... 할 말 잃음)
내가 기분이 왜 나빴나를 곱씹어 보니...
1. 대 놓고 너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고 내뱉는 오만 (넌 내 말만 들어라 그게 너의 역할이다)
2. 부탁을 해도 될까 말까인데 근거 없이 본인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생떼
3. 자신의 권리이다 생각하면 담당자가 몇 번을 일하든 내 알 바 아니라는 식의 뻔뻔함
4. 모든 문제를 '협의'하지 않고 '통보'하는 듯한 식의 태도 (대표님의 '용단'에 담당자는 알아서 따라라)
5. 내 직급을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선생님'으로 호칭하는 존중 없는 태도 (당신 직급은 내 알 바 아니다)
6. 본인이 감정노동을 유발하는 당사자라는 걸 알면서도, 그건 당연한 너의 업무라는 식의 태도
(본인의 태도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해하지 않는다)
A는 통화가 시작될 때 늘 '좋은 하루입니다~ 선생님~'하고 인사하며, 미팅 시 만나면 '선생님, 오늘 얼굴이 좋아 보이시는데요?'라는 기분 좋은 스몰토크로 시작하지만, 대화의 참여자인 나는 오히려 기분이 나빠진다. (마스크 껴서 눈만 보이는데 무슨 얼굴이 좋아 보여...)
그의 이런 멘트는 상대방에게 진심 어린 관심으로 발생되는 따뜻한 인사가 아니라, 자신이 상대방에게 호의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한 접대성 장치이기 때문이다.(본인이 상대방에게 진정한 호의가 없기 때문에 나오는 습관성 멘트)
A가 내뱉은 "원래 감정노동이 제일 힘든 일인데..."라는 말은, '당신이 감정노동하는 일을 해서 안타깝네'라는 의미도 있지만, '나로 인해 네가 감정노동하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건 원래 너의 역할이야'라고 얘기하는 것이라 그의 뻔뻔함이 정말 놀라웠다.
그런데 사실 나는 지금껏 일하면서 감정노동했다고 느껴진 적이 거의 없다. 모든 일은 협의로 풀어나가는 것이며, 모두 상식 선에서 서로의 업무 영역을 존중하며 일하기 때문이다.
'가식'과 '위선'의 훌륭한 사례가 A가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든다면 내가 오버하는 걸까?
내 주말 일상까지 침범하여 기분을 잡치게 만든 그와의 대화와 미팅.
계속 신경 쓰는 것 자체가 짜증이 나는데 깔끔하게 떨쳐지지가 않아서, 읽은 책 중에 대화와 관계에 대한 구절을 들춰봤다.
<마흔이 되기 전에>
대화의 목적은 오직 상대를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것이지, 지적을 하거나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간은 대체로 상대의 약점을 찾아내면 쾌감을 느낀다. 이 쾌감은 모든 대화의 치명적인 독이다. 최근에 당신이 실패한 대화가 있다면 곰곰이 복기해보라. 의도와는 상관없이 상대의 약점을 짚었거나, 상대를 깎아내림으로써 웃음을 유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타인을 깎아내림으로써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은 쉽고 유혹적이다. 하지만 진심으로 조언하건대 이 유혹에 빠지면 당신은 결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내 감정을 내가 바라보지 않으면 상대를 정확하게 읽을 수가 없다. 지나치게 감정적이면 상대의 생각을 제대로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 상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그가 화가 났는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는지, 지겨워서 그냥 져주는 건지...
<인간관계론>
사람들을 대할 때는 우리가 논리적인 존재를 상대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기억하라. 우리는 감정의 동물이고, 자존심과 허영에 자극받아 행동하며 편견으로 가득 찬 존재다.
사람들에게서 최선을 이끌어내는 방법은 인정과 격려입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생각이 다른 점부터 논의하기 시작해서는 안 된다. 양측이 모두 같은 것을 원하고 있고, 차이는 방법에 있을 목적에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해라.
편견 없이 솔직한 마음으로 그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보고 나는 열아홉 살 조세핀이 같은 연령대의 나보다 더 낫다는 결론 내렸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조세핀이 마땅히 받아야 할 칭찬도 다 못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혹시 내가 지나치게 방어적이고 딱딱한 태도로 A를 대했는지,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A를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대화를 복기해 본다.
'우리는 논리가 아닌 감정의 동물이며, 자존심과 허영에 자극받아 행동하며 편견으로 가득 찬 존재'라는 말이 가슴에 와 박힌다. 나조차도 인정과 격려를 받지 못하여 기분이 나쁜 것이고, 나도 그에게 적당한 인정을 돌려주지 않았을 수 있다.
다음번 미팅에는 대화 시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여유를 가지고 그를 더 인정해주는 대화를 해 보자.
대인배처럼 그의 분탕질에도 허허 웃고 넘어가 보자.
인생, 기분 잡쳐 있기에는 너무 짧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