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치 May 16. 2019

길치; 아픔으로 시작된 15년만의 백수 생활

회사와 이별, 아빠와 이별

15년 만에 백수가 되었다.

타의는 아니지만 가을 쯤 예상했던 퇴사를 당겨준 건 외부 요인이 없지 않아 있었기에 100% 자의도 아닌 것이 애매하다.


정말 자랑스럽고 사랑하던 회사였기에 떠나는 결정을 하기가 쉽지 않았었고 회사는 가만히 있는데 나 혼자 이별을 하느라 이별앓이도 혹독히 했었다. 그래도 다 정리하고 나오는 길..

펑펑 울며 신파 한 편 찍을 줄 알았는 데 왠걸. 하늘은 높고 푸르고. 오랜 복역이 끝나고 출소했을 때 이런 기분일까? 쇼생크 탈출처럼 두 팔 벌려 세레모니를 하고 싶을 정도로 후련했다.


15년, 아이가 태어나 중학교 2학년이 되는 긴 시간.

출산, 육아 휴직 6개월 빼고 한 번도 쉰 적이 없으니.. 좀 쉬어도 되겠다 싶었다.

늘 시간에 쫓겨 살았으니 여유롭게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아이와의 부족한 시간도 좀 채우고..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하고.. 생각만 해도 정말 설레였다. 그렇게 딱 두달을 보내고 좋은 곳에 이직하는 거야!

출근 날짜를 받아놓고 미국에서 오매불망 나를 기다리는 친한 언니와 친구도 보고 오면 딱 좋겠다 계획을 세웠다. 이 황금같은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자 시간표도 그려보고 스케쥴도 짜보고.. 돌아오는 월요일부터 시작될 골드백수의 하루에 그저 들뜨고 설레였었다.




주말을 보내면 이제 공식적 백수!

그런데 아이가 감기 기운이 있다. 열이 계속 나면 독감 검사를 해보라 했으나 독감예방접종도 했고, 또 한 번도 걸린 적 없었으니.. 별 걱정 없이 가벼운 감기약을 받아 왔다.


그리고 일요일 오전. 울려오는 아이 친구 엄마의 전화.

딸이 독감이니 우리 아이도 검사를 받아 보라는..그러고 보니 열이 떨어지질 않는다.

주말이라 두시간을 기다려 힘들게 본 진료에서.. 독감 판정. 5일간 등교 불가.

그렇게 나의 백수 계획은 자연스레 일주일이 미뤄지게 되었다. 그래도 일하는 엄마 둬서 다른 아이들의 평범한 일상이 늘 부러웠던 아이에게 엄마와의 시간을 더 주는 거니 좋게 생각하기로 하였다.


이틀 후, 일주일에 이틀은 저녁에 대학원 수업을 듣고, 마침 과제가 있어 학교가서 식사도 하고 과제도 하려던 참에.. 아 맞다 나 백수지.. 점심은 집에서 먹자..하며 가볍게 한 술 뜨고 있는데..



엄마의 비명 소리, 119와 통화, 어설픈 심폐 소생술, 까맣게 변해 버린 아빠..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정신 차렸을 땐 이미 종합병원 응급실 대기실이었고..

암 환자셨지만 치료를 다 마쳤었고 요즘 몸이 좀 안좋으셔 검사와 검사 사이에 집에서 쉬시고 계시던 아빠였다.

쓰러지시기 몇 분 전만 해도 약 챙기는 거 내가 도와드린다 해도 굳이 옥상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 엄마를 불러 약을 챙겨달라던 아빠를 너무 하다 생각하며 밥을 먹고 있던 나였다.


심정지에 대해 무지하여 40분간의 심정지가 이런 후유증을 남길 줄 몰랐었다.

저온 치료를 끝내면 뇌도 회복 기간을 거쳐 서서히 깨어난단 글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며 곧 깨어나시겠지.. 했었다. 아빠는 예후가 많이 안 좋은 케이스였고, 눈꺼풀 하나 움직이시지 못하셨다.


아빠와 트러블이 제일 많고, 아빠가 제일 무섭고, 아빠가 가장 걱정하는 딸이 나였다.

사회 생활은 자신있었지만 검소한 아빠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던 터라 혼도 많이 나고 막말로 쓰러지시기 전까지 한심해 하던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본인을 가장 많이 닮아 정도 많고 마음도 약한 딸.. 그러나 본인의 삶과 너무도 다르게 살아가는 가장 한심한 딸.. 그래서 같이 살면서도 어색하고 불편한 기억이 더 많다.

그런 불편한 아빠였지만, 그저 인공호흡기 통해 숨만 쉬시고 계신 걸 보니 정말 내가 잘못했던 것만 떠오르며..

눈물만 펑펑 나올 뿐이었다.


독감 걸린 딸과 남편의 심정지로 충격 받으신 엄마. 대학원 마지막 학기라 학위 취득 조건을 충족하기 위한 학회 준비 데드라인..챙겨야 할 가족이 있고 당장 끝내야 할 일이 있었다.

약한 노약자들을 챙길 사람은 나 혼자기에 우는 건 집에서 울고, 운전하며 울고, 면회 때만 울고 나머지 시간엔 시간을 쪼개어 아이를 케어하고 내 학교 일을 하고 병원 일을 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빠는 그렇게 40일을 버티셨고, 점점 임종 증상이 나타나고 얼마 남지 않으신 걸 모두 알 수 있었다.


어린이 날에 온 식구가 다 모인 날.. 어버이날까지 못 버티실 것 같아 환자복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엄마와 나 포함한 두 딸과 가족사진을 남겼다. 그리고 아빠는 무언가 느끼시는 건지 눈물을 주르륵 흘리셨다.

그게 아빠의 살아계신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음 날 새벽, 임종 연락을 받았고 그렇게 아빠의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집중 치료실에 계셔 면회 시간 외에는 면회 불가라, 그 시간에 납골묘 부터 장례식장을 미리 알아본 게 도움이 되었다.


십수년의 사회 생활이 헛되지 않은 것인지 직장을 다니지 않고 있음에도 많은 손님들이 와 슬퍼할 새 없이 장례를 치르게 되었고 남편을 잃은 엄마가 주저 앉을까 일부러 슬픈 분위기 만들지 않았다.


40일, 준비 시간을 주신 것일까.

생각보다 하늘이 무너질 듯 힘들거나 슬프진 않다.

다만, 아빠를 괴롭히던 암세포들이 다 타버렸으니 이제 하늘에서 편하시겠지. 좋아하시던 막걸리 실컷 드시겠지. 하는 생각 뿐..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


원래 계획으로는 지금쯤이면 졸업 준비도 다 끝내고 취업 준비를 마쳤어야 한다. 그래서 6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보아야 한다.


디자이너라 또 나름 많은 포트폴리오를 받아 보던 입장에서 내 포트폴리오는 뭔가 다르게 만들겠다며 이것저것 계획도 세웠었는데.. 두달의 시간을 보내고 나니 거의 리셋이 되어 막막하다.


그래도 대면대면한 아빠와의 사이에서 가족을 위해 적극적으로 보낸 시간이 없었는데, 엄마를 돌보고 아이를 돌보고 바깥일을 책임지던 그 시간을 후회하진 않는다. 충분히 노력했기에 지금 더 가벼울 수도 있기에..


이제 대학원 졸업을 위한 막바지 단계인 학회 발표를 하루 앞두고 있다.

감기 몸살이 세게 왔지만 약을 먹고 링거 거부 투혼(링거 맞을 시간도 아까워서)으로 거의 마무리 단계이다.

행사도 많은 5월.. 이것 저것 겹쳐서 숨이 막히기 직전이지만..


늘 해왔던 데로.. 하나 하나 차분히 하다 보면 내가 원하던 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내려놓고 차분히 내일 발표 준비를 하고 있고, 그게 끝나면 다음 아이 생일 파티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게 끝나면 또 그 다음 일.. 그 다음 일..


기댈 곳이 없는 집안의 가장이 된 내가 버틸 수 있는 방법은 차분하게 하나하나 처리해 나가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안 그러면 또 길을 잃어버릴 것 같아서..


참 아픈 일들만 많았던 2019년 봄..

이제 그만 아프고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길 바래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꼬마화가의 작품; 고양이 천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