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아이, 더 아픈 엄마
"어머님, 학교에서 아이에게 이런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담임 선생님께서 학교에서 소소한 일이 있었다며 전화로 알려주셨다.
그렇지만 나에게 "곧 학교에 가지 않으려 할 겁니다."로 들린 건, 그동안의 경험 때문이겠지.
그리고, 아이는 학교에 가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학기 초, 출퇴근 시간을 늦춰가며 챙겨야 하지만 등교하는 아이를 보며 이렇게 좋아지려나 희망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 전화 한 통으로 나의 희망에 어둠이 드리웠다.
심리 검사 결과가 일반적이지 않았던 아이는 음악 수업 대신 상담이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담임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아이는 상담실로 이동해야 하는 상태였다. 그 내용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음악 선생님께선 아이가 수업에 오지 않았다며 찾으러 오셨다. 그러면서 아이를 불러 왜 수업에 오지 않았냐 하니 아이는 상담실에 가야 했었다며 대답했고, 그 과정이 매끄럽진 않았다 한다.
그 일이 있고, 아이를 지극히 챙기시는 담임 선생님께서 교실 앞을 지나시다 우리 아이가 잘 있는지 교실 문을 열고 확인하셨고, 억울함에 가득 차 있던 아이는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한다. 다른 아이들은 갑자기 우는 아이가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고 반 아이들의 반응에 서운함까지 보태어 지금까지 등교를 거부하고 있다.
누구나 다 나를 위로해 주는 건 아니야
살면서 자연스레 깨닫는 이치다. 아니, 그걸 깨닫기 전에도 보통 나를 위로해 달라고 몸부림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아이는 펑펑 우는 자신에게 손 내밀어 주는 친구가 없음에 등교거부로 서운함을 표현한다. 이 간극을 어찌 좁혀줘야 할까? 아무리 좋은 말로 얘기해 봤자 효과가 없다.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이다.
하루, 이틀, 일주일... 시간만 흐른다.
이 과정 중간에, 나는 퇴사를 했고 겸사겸사 아이와 잠시 일본으로 떠났다. 하지만, 하필 바이러스성 뇌수막염이 의심되는 증상으로 아이는 실컷 아팠고 여행은 고사하고 추가 비용을 들여 서울에 빨리 들어와야 했다. 퇴사와 아이의 아픔, 등교 거부..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벌써 5월 중순이다.
"엄마, 나 내일부터 학교 잘 갈게."
"그래, 오늘 꼭 일찍 자자."
매일 밤 밝은 얼굴로 하는 약속은 다음 날의 피곤함에 거짓이 되어 버린다.
그래도, 그리운 아빠
매일매일 반복이다. 전 날 학교에 간다고 했던 아이는 아침에 다른 얼굴로 등교를 거부하고, 나는 그나마 자식과의 관계를 위해 화를 삭이고 삭인다. 그러다 지난주 금요일, 다시 침대에 눕지 않고 아이는 담담히 학교에 갔다. 정말 기뻐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오히려 어리둥절함에 아이를 데려다주고 집에 와서도 한동안 멍했었다. 회사에 가지 않아도 아이가 집에 있고 없고의 질은 다르다. 누군가 챙겨야 하는 상태에서 오로지 내 결정만으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이다. 아이가 오랜만에 등교하자 나의 하루는 알차고 바빴다.
아이에게 어떤 변화가 있길래 갑자기 학교에 갔을까? 이유는, 오랜만에 아빠와 영상통화를 했다는 것이다. 묻지도 않았는데 아빠의 이야기를 하는 아이 표정이 꽤 상기되어 보인다.
"예전엔 아빠보다 엄마가 더 좋았는데, 지금은 아빠랑 엄마랑 똑같이 좋아. 아빠도 많이 힘들대.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이 아프셔서... 그리고 아빠가... 아빠가..."
그렇게 아빠가 그리웠구나.. 차마 이곳에 쓰진 못하지만 아빠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던 아이가 다시 연결된 아빠에 이렇게 달라졌다.
제발, 아이 좀 챙기라고 혼잣말을 해본다.
아빠 약발도 오래 못 가네
지난 주말, 아이는 오랜만에 아빠와의 연락, 좋아하는 사촌언니와 이모와의 만남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항상 최악의 상황에 무너지지 말자고 늘 내려놓은 상태지만 당분간은 좀 괜찮겠구나.. 하고 마음을 놓았었다. 그러나, 아무 일 없는 평온한 월요일 아침에 기분 좋게 아침을 먹은 아이는 다시 침대에 누워버렸고 그렇게 또 학교에 가지 않았다. 다음 날인 오늘도 마찬가지로...
정말 아무 이유 없이 학교에 가지 않았기에 본인도 불편한지 나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며 내 기분을 확인한다. 지난주 오랜만에 학교 간 아이를 보고 정말 행복해하셨던 선생님도 속상하셨겠지만, 그래도 아이에게 티 내지 않으시고 기분 좋게 말을 걸어주셨다.
"날씨가 너무 좋다, 학교 와야지?"
그러나, 아이가 선택한 방법은 너무나 안타까웠다.
친구는 그런 게 아닌데...
선생님께서 아이와 주고받은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그 내용은 아이가 반 아이들에게 치킨을 사겠다고 쿠폰을 샀다는 이야기다. 선생님께선 엄마와 상의하라며, 학교부터 나오라고 대화를 마무리 지셨지만, 내가 알아야 하는 내용이기에 전달해 주신 거다.
아이는 아빠에게 받은 생일 용돈으로 반 친구들에게 돌릴 치킨 브랜드콘을 30만 원어치나 샀고, 그걸 돌리려고 담임 선생님께 얘기하니 선생님께서 일단 엄마와 먼저 얘기하라고 보류시킨 것이었다. 집에 와서 하나하나 결제 취소를 해주며 치킨을 돌려야 할 때는 엄마가 선생님과 상의해서 적당한 날에 보내면 된다, 이런 건 네가 안 해도 된다, 친구들에게 뭔가 주고 싶다면 꼭 이런 방식은 아니어도 된다고 얘기해 주었다.
아이도 순간 아빠에게 받은 용돈을 다 써버린 자기 모습에 놀랐고, 돈을 되찾게 되어 다행인 모습이었다. 다만, 그렇게 친구들에게 환심을 사려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깝고 슬펐다.
내가 10살 때, 지금 이 집으로 이사했을 때가 생각난다. 이미 이 동네엔 어울려 노는 아이들이 있었고 나와 동생은 이방인이었다. 그래도, 고무줄 놀이 하는 아이들 주위에 기웃거리다 같이 놀게 되었고 그렇게 친구가 되었었다. 매일매일 놀아도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가며 그렇게 재밌게 놀았다.
요즘 아이들은 그렇게 놀기 힘들다. 모르는 사람과의 소통은 우선 위험하며, 자연스럽게 친해질 시간조차 아이들에겐 없다. 나부터도 아이를 그렇게 키우지 못했다. 다른 엄마들처럼 커뮤니티를 만들어 아이들끼리 친해질 환경을 만들어주지도 못했다. 여러모로 복잡한 생각이 든다.
가장이자 일을 해야 하는 엄마로서 정말 열심히 일했고, 많은 책을 읽어주며 꼭 안아 재웠고, 주말마다 들로 산으로, 박물관, 미술관으로 아이와 많은 경험을 했는데 정작 친구를 사귈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에 힘이 든다.
'친구를 사귈 환경을 만든다'라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러나, 요즘 아이를 키워보니 알겠다.
지금은 친구를 사귈 수 있는 환경조차 조성해줘야 하는 시기인 것을...
그걸 못한 나는, 아이의 아픔을 그대로 바라봐야만 하는 벌을 받고 있다.
물론, 같은 환경에서도 잘 지내는 아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누구를 닮았건, 내 아이는 그렇지 않은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 유일한 내 소원은...
아이가 단짝 친구를 만나는 것이다.
그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