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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치 Oct 25. 2019

백수 종료 선언

백수 탈출기

올해 3월 퇴사 후, 신나게 놀고 피아노와 기타도 배우고, 그림도 그리고 영어 공부도 하며 즐거운 백수 생활을 즐기다 8월 대학원 졸업 즈음엔 새로운 회사에서 새로운 동료들과 다른 산업군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편히 쉴 팔자는 아닌 건지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을 겪고 일어서길 반복하다 보니 여름이 훌쩍 지나있었고 쉽게 생각했던 이직은 결코 쉽지 않았다.


게임 회사 경력이 발목을 잡을 줄이야..

우선, 게임 업계에서의 15년 간의 경력이 이직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줄은 몰랐다.

난 회사의 프로덕트인 게임을 잘 표현하고 게임 유저를 위한 디자인을 했을 뿐인데, 게임 외의 디자인은 힘들 것 같다.. 란 피드백을 들어야 했고, 아니라고 어필할 기회도 없었다. 사실, 여러 개인 프로젝트 들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나도 안일했던 것 같다. 이름 있는 회사에서의 이 정도 경력이면 쉽게 패스 할 줄 알았던 나의 오만함을 반성한다.


게임 회사만 아니면 되었는데..

13년 전, 이 전 회사로 이직할 당시 난 하드 게이머는 아니었지만 즐겨하던 게임을 서비스하는 회사였고, 충분히 게임 자체에 대한 관심과 잘해보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그 안에서 많은 기회를 얻었고 충분히 성장했고 경험했다. 그러나, 게임이 주 프로덕트인 게임 회사에서는 모바일이나 새로운 트렌드, 기술을 접하기 점점 힘들어졌기에 이직을 하게 된다면, 꼭 내 삶과 관련된 관심 있는 분야로 가겠다 마음먹었었다.

그래서 그나마 문턱이 낮은 게임 업계는 아예 보지도 않았더니 나의 선택지는 훅 줄어버렸다. 하루 종일 채용 사이트를 뒤졌는데도 지원하고 싶은 회사가 한 군데도 없을 때는 살며시 게임 업계를 돌아보곤 했지만, 초반에 마음먹었던 것을 되돌리며 창을 닫곤 하였다. 


이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그나마 중간중간 헤드 헌터들을 통해 본 인터뷰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인터뷰 1 - 귀를 막은 회사

나름 작지만 깔끔한 회사 이미지와 콘텐츠.. 해 볼만 하겠다 싶었다.

1차 실무 인터뷰, 2차 대표 인터뷰 모두 하루에 치러졌고 간단하게 1차를 보았다면 2차는 진이 빠지는 인터뷰였다. 과장해서 말하면 대표가 10분쯤 이 얘기 저 얘기 중심이 없이 말을 하고 이것이 질문인지 맺음말인지 모르게 끝나면 난 그동안 질문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기억하고 있다가 대답하는 형태..

압박면접도 아니고 대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두서없이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의 고민들, 불만들과 이루고자 하는 목표 등등. 첫 느낌이 좋지 않았지만 1차는 합격했다 연락을 받았고 1주 후 이어진 티타임. 아마 여기서 서로 잘 맞았다면 지금 난 입사하여 일을 하고 있었겠지. 차분해 보이던 1차 인터뷰의 실무진은 디자이너 없이 만나자 "여기는 자기 계발 같은 거 할 수 없다. 일이 오면 쳐내야 하고, 퀄리티는 필요 없다. 못하는 디자이너는 자르면 된다. 그 권한은 당신에게 있다. 난 당신을 존중할 거다. (그래도 코칭으로 나아질 수도 있지 않나요?) 우리는 그런 거 없다. 그런 거 할 수 있는 회사가 아니다.. 중략" 이렇듯 내가 겪어 오던 팀과는 너무 상반된 의견을 갖고 있기에 같이 일하고 싶은 마음이 훅 줄어들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만난 대표, 역시 또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내 의견은 듣고 싶은 건지.. 아니 조금이라도 들어줄 의향이 있는 건지 예의상 끄덕거린 고개로 목이 아파올 정도였다.

그리고 두 시간이 지나고, 예의 바르게 인사 후 나와 헤드헌터에게 연락했다. 

"더 이상 진행하지 말아 주세요"


인터뷰 2 - 인터뷰어도 준비해야 해요.

내가 인터뷰어로 들어갈 땐, 아무리 바빠도 후보자에 관련된 자료를 꼼꼼히 리뷰하고 질문지를 작성했었다. 그리고 다른 인터뷰어가 질문한 내용도 다 기록하고 나중에 리뷰 할 때 후보자의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고 판단하려고 노력을 했었다. 후보자가 너무나 기대에 못 미쳐도, 크게 기대가 가지 않는 후보자여도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 그 과정을 빼놓은 적이 없다. 그런데 두 번째 본 회사에서 아.. 내가 그동안 해왔던 게 정말 잘한 것이었구나.. 하고 느끼게 된 계기가 인터뷰어의 자기소개도 없이 농담으로 시작한 인터뷰, 그리고 뭘 질문해야 하나.. 자기네들끼리 고민하더니 바로 "우리 사이트 어때요?"라는 질문.. 충분히 사이트와 서비스를 분석했었고 제안을 준비했었다. 사실, 장점이라곤 없고 모두 뜯어고쳐야 했던 사이트였기에 바로 앞에 (곧 퇴사할) 디자인 팀장일지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 옳거니 하고 적나라하게 깔 순 없었다. 대략적으로 긍정적으로 보인 점과 개선해야 할 점을 말하고 이어서 인터뷰 흐름에 따라 자세히 이야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저희 회사에 대해 궁금한 것은요? 그리고 몇 가지 질문 후 20분 만에 인터뷰는 종료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들은 피드백 "적극성 부족". 

정말 가고 싶은 회사는 아녔기에 나의 속마음을 읽었다면 그들은 사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는 거고, 아니라면, 스스로 조차 제대로 된 인터뷰 경험이 부족하고 적절한 질문을 던져 후보자의 자질과 인성을 판단해 내는 소양이 부족한 것이다. 그저 수준 떨어지는 사이트와 서비스를 분석하느라 보낸 내 시간이 아까울 뿐이다.


인터뷰 3 - 작지만 가보고 싶던 회사

몇 개월 전 팀장 포지션으로 제안이 왔던 회사였다. 그땐 콧대가 높을 때로 높았던 때라 정중히 거절했었다.

이번에는 팀장이 아닌 시니어 디자이너. 사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고 어느 정도 처우만 맞는다면 포지션은 중요하지 않기에 인터뷰 요청에 수락했다. 그리고 또 사이트와 서비스, 업계 분석 등등의 인터뷰 준비를 했다. 

이 날도 1차와 2차 인터뷰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1차는 나의 팀장이 될 수도 있는 개발자 출신 팀장과의 인터뷰, 정말 친절했고 UX와 디자인에 대해서는 경험과 지식이 거의 전무해 보였다. 디자인에 대한 모든 권한을 시니어 디자이너에게 줄 거라며, 같이 일하고 싶다고 화기애애하게 끝냈고, 임원과의 2차 인터뷰 또한 순조로웠다. 앞서 봤던 인터뷰들에서는 개인적인 질문을 많이 하여 당황스러웠는데 (결혼 여부, 자녀 여부, 자녀가 있는데 야근 가능 여부 등) 이 날의 인터뷰에서는 그 어떤 개인적인 질문을 하지 않았고 나의 경험을 존중했고 앞으로 자사 서비스의 발전 방향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다. 생각했던 규모는 아니었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중요하니 이 곳이라면 다시 시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스템과 프로세스는 같이 만들어 나가면 되고 UX와 디자인의 중요성에 대해 성과로 입증하면, 팀 규모도 더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1주 후, 대표와의 인터뷰 또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이뤄졌고, 내가 생각하고 있던 문제들을 이미 깊게 고민하고 있었고, 또 그에 대한 해결안에 대해 길을 잃은 상태였기에 충분히 기여할 가치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인터뷰 결과를 기다렸다. 중간중간 내부적으로 논의가 늦어지고 있으니 양해를 구한다며 연락이 오긴 했으나, 이 곳만 기다리고 있기엔 나의 시간은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한 달 후, 오늘 연락이 왔다.

"내부적으로 치열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저희 회사 규모가 작아 길치님을 모시기엔 회사의 그릇이 작다고 판단되어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중략"


더 적합한 적임자가 나타난 것인지, 나의 최근 연봉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한 달여간을 기다리면서 입사하고자 했던 마음이 사라진 상태라 다행이었다. 그저 어떤 결론을 내릴지 궁금해서 두고 보고 있었을 뿐.

구직자의 시간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회사.

인터뷰어 1,2,3 그들의 친절하고 매너 있는 모습과 상반되는 행동이지만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려 했으나 그곳의 결정만 기다리고 있었다면, 인터뷰 준비까지 총 6주의 시간을 버린 셈이 된다. 


결정이 늦어지게 될 즈음 지인 추천으로 다른 곳 인터뷰를 볼 수 있었고, 통쾌하게 회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랜 시간 수고하셨습니다. 저도 팀장 포지션으로 최종 합격되어 오퍼를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인터뷰 4 - 내 인생 최고 힘들었지만 의미 있던 인터뷰

추천이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인터뷰 고개를 넘어야 했다.

새로운 기술이라 어렵고 막막하기만 한 분야라 차근차근 기본 개념부터 공부를 했고 책을 읽고, 사이트와 관련된 글 등 관련된 것이라면 다 읽고 정리했다. 준비하는 과정이 힘들었지만 떨어져도 아깝지 않을 정도의 지식이 쌓였고 업계를 바라보는 시야도 많이 넓어진 것 같다. 준비하다 보니 지원하는 회사에 가고 싶은 마음은 점점 커져갔다. 정말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을 넘어선 기술과 서비스를 준비하는 곳, 어렵고 힘들겠지만 그 무리에 일원이 되고 싶었고 서비스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내가 있고 싶어 졌다.


이 곳 역시 1차, 2차 같은 날에 진행이 되었다.

1차는 입사하게 되면 팀원들이 될 분들과 함께 실무에 관한 인터뷰, 2차는 타 팀 팀장 및 임원과의 인터뷰였다.

디자이너들과 함께 한 1차 인터뷰는 역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화기애애하고 서로 잘 맞았던 것 같다. 팀장으로서의 경험과 앞으로의 계획들이 디자이너들이 원하는 모습과 많이 근접했고, 내가 알고 있는 걸 공유하고, 같이 발전시킬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함께 가기에 충분히 적극적이고 훌륭한 팀분들 같았다. 2차는 듣던 대로 똑똑하고 날카로운 분들이었다. 그동안 개념과 기술적인 걸 익히는데 집중했어서 인지, UX와 관련된 문제 해결 사례에 관한 질문들에서 급하게 시계를 돌리느라 진땀이 났다. 말이 꼬이고 엉뚱한 대답을 하기도 한 것 같은데 그래도 나의 문제 해결과 협업 방식 등을 맘에 들어하셨던 것 같고 그 어렵다던 인터뷰를 패스할 수 있었다. 


문제는 3차, 예정에 없던 대표님과의 3차 인터뷰가 잡혔고 또다시 1주일 간 인터뷰 준비에 매달렸다.

팔 수록 알 것 같기도, 아리송해지기도 하는 신비한 분야.. 보통의 대표 인터뷰는 다 뽑아놓고 인성만 보는 거라는 주위의 격려에도 왠지 힘든 인터뷰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부쩍 들었었다.


그리고 인터뷰 당일,

일찍 나와 집 근처 단골 커피숍에서 마지막 정리를 하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평소 가던 길과 다른 길로 접어들었는데, 가슴에 무언가 훅 밀려온다.


아빠가 한 달간 누워 계시다 하늘나라에 가신 요양병원이 눈 앞에 있다.

평소 일부러 이 길로 다니지 않았는데, 지하철을 타기 위해 큰길로 가려다 무심결에 마주친 곳..


'아빠, 저 그동안 엄마랑 아이 잘 챙겼어요. 이제 일하고 싶어요. 오늘 인터뷰 잘 보게 기도해주세요.'

지금도 보면 눈물이 차오르는 2층 창문, 왠지 아빠가 잘 보라고 응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대표님과의 인터뷰는 참으로 참으로 힘들었다.

한 회사의 대표가 되면 대표협회 이런 데서 스마일 마스크를 보내주는 건지, 역시 속내를 알 수 없이 계속 웃는 표정이시긴 했으나 그분이 하는 난이도 높은 질문들, 나름의 철학적이고 정답이 없는 질문들 속에서 정신을 안 놓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다. 라며 정신을 바짝 차리려 노력했었다. (호랑이 굴에 끌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산다.) 인터뷰가 끝나고 다리에 힘이 풀리며 아직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싶었고, 왜 그 정도 수준까지 생각을 못했을까.. 하며 자책도 해보고 아니, 그럼 내가 대표나 임원이겠지! 하며 반박도 해보았지만 (속으로) 이미 인터뷰는 끝났고 엎질러진 물.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스마일 마스크 안에서 가끔 비치는 눈빛을 읽어보자면, 그분에게 난 평이했고 기대치를 채울 수 있는 후보자는 아니었다. 그래도 나의 한계를 돌아볼 수 있었고, 앞으로 내가 어떻게 성장해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주는 훌륭한 인터뷰였다. 떨어져도 손해는 아니라며 나 자신을 토닥였다.


그렇게 속을 태우길 며칠.. 합격 통보를 받았다.

대표님 맘에 쏙 든 건 아닌 건 같으나, 아마 앞서 본 인터뷰에서 좋은 인상을 줬던 게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기도 하다. 이럴수록 들어가 할 일이 많고, 부담이 되지만 최종 결정은 났고, 난 그 회사가 가고 싶으니 가서 열심히 하면 된다. 3개월의 수습 기간이 부담되지만, 한 편으론 설레임에 가슴이 떨리기도 한다.




이렇게 7개월 여 간 백수 생활이 종료될 예정이다.

실업 급여 7개월 치를 야무지게 타 먹고 아빠를 보내드리고, 집수리하느라 혼자 원룸 이사도 했고 (갈 때, 올 때 두 번이나), 아이가 이제 충분하니 일하러 나가라 할 만큼 아이와 시간도 보냈다. 그리고 야금야금 여행도 다니고 많이 놀기도 했다.


최근엔 마음이 조급해져 의미있게 이 시간을 즐긴 것 같지 않아 아쉽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

출근일 까지 한 동안 쉬어서 떨어진 실무 감도 되찾고 혼자 여행도 가고 어디든 합격하면 하려고 미뤘던 일들을 하나하나 할 계획이다.


그리고, 또 이 글은 몇 명만 보겠지만..

혹시나 한 회사의 채용을 담당하시는 분이 보신다면, 구직자의 시간 또한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지원을 하기 전에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다듬고 지원한 회사에 일원이 된 거 마냥 회사에 대해 공부하고 준비하는 과정, 지원 후 결과를 기다리는 애타는 마음과 시간, 긴장하며 인터뷰에 임하고 본인의 에너지를 최대한 끌어내어 씁쓸한 질문에도 웃어야 하는 지원자들을 존중하여 과정을 투명하게 공유해주고, 아니라면 다른 기회를 찾을 수 있도록 빠른 업데이트로 지원자들을 배려해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구직자가 되기 전엔 미처 몰랐던 것들이다. 최종 결정 권한은 없었기에 내 선에서 결정을 하고 나면 이후는 어떻게 진행되던지 큰 관심이 없었고, 있었다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다만, 이제는 같은 입장이 된다면 나서서 업데이트를 빨리 하자고 제안할 수 있을 것 같다.




취업과 이직을 준비하는 모든 구직자들.. 기운 내시고 떨어지는 자존감 허리춤에 매달아놓고 잘 버티시길!

그리고 원하는 직장에 들어갈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나도 수습기간을 잘 보내 합격한 회사의 진정한 일원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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