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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치 Nov 04. 2019

학예회 스트레스

아이의 성장통

얼마 전부터 아이의 알림장에 "학예회 주제 준비하기"가 뜨기 시작했다.

자세한 내용은 혼자 해도 되고 팀을 짜도 되며 5분 내외의 학예회를 각자 준비하라는 것.

남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고 혼자 조용히 노는 걸 좋아하는 아이의 성향을 잘 알기에 덜컥 겁이 났고, 역시 아이는 그 어떤 것도 자신이 없어했다.


"나는 노래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잘 부르는 편은 아니야. 그리고 춤추는 것도 싫어하고 피아노를 배웠지만 30초밖에 못 쳐. 난 그림을 잘 그리는데 5분 동안 어떻게 그려."


아이의 말에 충분히 공감했다. 아이는 취미도 특기도 그림이고, 가장 좋아하는 것도 그림이다.

그런 아이에게 그림을 빼고 학예회 주제를 찾는다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제안을 한 것이, 너의 그림들을 큰 종이에 붙여 5분 동안 소개하자는 것이었는데, 채색까지 끝낸 작품이 몇 개 없기에 그것은 또 싫다 한다. 5분 동안에 그릴 거를 연습해서 빠르게 그리는 건 어떻겠냐 해도 싫단다.

주제 선정 데드라인은 다가오는데 애가 탔다. 


결국,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아이가 아플 때, 결석할 때를 빼곤 전화할 일이 없었는데 학예회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전화를 했다. 걱정했던 내 마음과는 다르게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그냥 아이들 장기자랑이니 걱정하시지 마시라고, 그리고 꼬마화가는 친구랑 같이 한다던데요?라고 하신다. (금시초문인데..)


나중에 아이에게 물어보니 친구는 피아노를 치고 아이는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하길래,  약간 걱정이 되었으나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주면 되지.. 하고 가볍게 넘겼다.


그리고 며칠 후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친구랑 하기로 했던 건 무산되었고 혼자 준비해야 하는데 아직도 주제 선정에 애를 먹고 있다고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화였다. 그때 속으로 삼키고 있던 질문을 했다.

"선생님, 제 생각에는 아직 9살 아이들은 스스로 팀을 짜거나 학예회를 기획하기엔 어린것 같아요. 그리고 저희 아이는 잘 아시다시피 낯을 많이 가리고, 남 앞에 나서는 데 시간이 필요한 아이입니다. 지금 나이엔 단체로 참여하는 것부터 시작하고, 좀 더 큰 후에 스스로 준비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꼭 학예회 참석하는 게 필수사항인가요?" 

선생님께선 이번에도 역시 또 별 것 아니며, 아이들이 다 못해도 그저 귀여우니 걱정 말라며 유튜브를 뒤져 얼른 주제부터 정하라 하신다. 휴..


그래서 뒤졌다. 유튜브를..

그리고 아이를 불러 "수화로 노래하기"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이건 춤도 아니고 언어이니 부끄럽지 않을 거라며.. 아이는 내키지 않는 듯했지만 수락했고 일단 학예회 주제를 정하고, 음악을 보내는 것 까진 마무리 질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 학예회 날이 하루 이틀 다가오면서 아이의 스트레스는 점점 심해졌다.


수화를 외우고 못 외우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친구들 앞에, 친구의 부모님들 앞에 나가는 게 너무 힘들단 거였다. 주말 내내 같이 연습하고 걱정하고 연습하고 걱정하고, 반복이 되었다.


그 스트레스와 압박은 본인이 가장 크게 느끼겠지만, 아무리 아이를 설득하고 달래어도 금세 다시 걱정의 원점으로 돌아오는 걸 지켜봐야 하는 부모의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다. 정말 고구마 백개 먹고 물 안 먹은 느낌이 이런 거구나 하는 답답함..


아직 남 앞에 혼자 나서본 경험이 없는 아이에게, 그거 별거 아냐. 너를 보러 온 사람은 엄마랑 할머니뿐이야. 그러니 신경 안 써도 된다고 달래 보았자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쓴 수가 선생님께 우리 아이는 학예회 참석이 불가능할 것 같다고 얘기하고 참석 안 하는 걸로 얘기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빠졌을 때는 큰 후회랑 아쉬움이 남을 것이라고도 얘기해주었다. (지금 생각하니 협박이구나)

 


고1 봄, 친구들과 소풍 장기자랑을 나가게 되었다. 우리는 각자 집을 돌아다니며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를 열심히 연습했고 가장 몸치인 나는 좀 더 얌전한 동작만으로 가능한 김지현 씨 역할을 맡게 되었다. 날렵한 춤사위로 중성적 매력을 펼쳤던 친구들 덕에 우리는 큰 호응을 받았고 스타가 되는 기분을 잠깐 경험해볼 수 있었다. 


그 기세를 몰아 가을의 수학여행에서도 장기자랑 대표로 뽑혔고 서태지와 박진영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로 하고, 수학여행에 가서도 잠을 안 자고 연습을 하였다. 그런데 장기자랑 하루 전 날, 자꾸 틀리는 나는 친구들의 지적이 구박처럼 느껴졌고, 결국엔 나 안 할 거라며 바로 연습하던 방을 박차고 나와 화장실에서 그렇게 울었었다. 그리고 내가 빠진 공연을 관객석에 앉아 볼 때의 그 마음이란, 좀 못하면 어떻다고 친구들과의 즐거운 추억을 걷어차버린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아직도 노란 후드티를 입고 서태지 모자 (좀 웃긴다)를 쓰고 춤을 추던 친구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련하다. 그리고 그 안에 나는 없다.




내 경험을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아이에게 나는 그저 푼수같이 잘 나서는 사람이었는데, 엄마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는 것에 놀란 표정이었다. 그리고 유치원에서 단체로 춤 안 춰서 할머니한테 끌려 나간 이야기, 번호 지목으로 책을 읽어야 하는데 놀라 서서 울어 버린 이야기.. 그리고 아직도 발표를 싫어하는데 대학원 다니면서, 회사 다니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경우는, 준비를 아주 아주 잘해가면 좀 덜 떨린다고 나름의 팁도 얘기해주었다.


그 뒤로도 몇 번 마음이 왔다 갔다 했지만, 일단은 진정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오늘 최종 리허설이었는데, 무사히 올라갔을지 아직 모른다.

아이가 일단 용기를 내어 올라가고, 별 거 아니네~ 하고 느꼈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언젠간 겪어야 할 일들을 힘들게 겪어내며 성장통을 겪는 아이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잘할 수 있어. 꼬마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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