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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치 Oct 09. 2019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고 장영희 님 에세이를 이제야 읽고..

수년 전, 아니 10년 도 더 전에 내가 성산동 살 때였으니 2008년쯤에 구입했던 것 같다.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가볍게 읽을 셈으로 집어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다른 책들에 밀려 이 집 저 집 이사할 동안, 이 책장 저 책장 옮겨 다닐 동안 안 읽어서 처분하긴 그렇고 언젠간 읽어야지 했던 책이다. 이렇게 오래전에 구입했던 걸 알게 된 건 책 위에 찍힌 도장. 유명 도서 쇼핑몰에서 진행했던 이벤트로 구매했던 도장을 성산동 집에서 신나게 찍어대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 출근길에 모르는 번호로부터 책 보는 모습이 이상형이니 연락 달라. 이런 으스스한 문자 메시지를 받고는 모든 책에 네임펜으로 연락처와 이름이 있는 도장을 지워댔었다.

그 흔적을 보고 이렇게 오래전 구입했던 책이구나 싶었다.


요즘 집 정리 중이라 다 본 책, 사용 안 하는 물건 등을 정리 중이라 다시 이 책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평소와 달리 한 페이지를 넘기고.. 그 자리에서 끝까지 읽게 되었다.




난 장영희 님 팬이어서 이 책을 산 건 아니었기에 어떤 정보도 없이 읽게 되었다.

그리고 그분에게 금세 빠져들었다.


교육자 집안에서 자라 유학을 하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교수를 직업으로 갖고 계신 분.

그러나 한 없이 겸손하고 털털하며 나 같은 평범한 사람도 공감할 만한 생각과 실수를 하고 계신 분.


가끔 너무나 좋은 책들을 읽을 때에도, 작가의 지적 수준과의 괴리감에 감동을 느끼기 전에 마음의 벽을 쳐버리곤 했는데.. 이 분 책은 그런 게 없었다.

그리고 우리의 두 다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튼튼하게 제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 분은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하신 분이었다.


책에서 그 내용을 언급하기 전까진, 난 이 분이 다리가 불편하신 분이라 느끼지 못했고, 정말 사회가 장애라 부르는 신체의 불편함은 단지 시각의 차이에 따라 불편함이 될 수도, 불행의 씨앗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본인의 지식과 경험, 올바른 생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좋은 글로 많은 감동을 주시던 분께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은 큰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책 내용은 공부를 하시면서, 가르치시면서 그리고 수많은 일상생활 속에서 작은 행복을 찾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부족함을 인정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낸 에세이다. 베스트셀러 에세이는 거의 읽는 편인데 가끔 저자의 가벼움, 대중을 공략하는 부분이 느껴지면 거부감이 들기도 하고 명쾌하게 해답을 내려주는 글들엔 금수저의 여유로움으로 느껴져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분은 다르다. 환경 자체는 나보다 나을지언정 살아온 굴곡은 비할바 아니다. 그런데도 담담히 삶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모습, 작은 것에서 큰 의미를 끌어내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았다.


읽으면서 이 분의 요즘 글도 읽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책을 끝내기 전에 저자에 대해 검색하는 건 나 스스로 불허했기에 참다가, 결국 앞표지 뒤에 작가 소개를 보게 되었는데.. 2009년 5월 세상을 떠나셨다는 글을 보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57세.. 하늘나라 가기 너무 이른 나이.. 지금 살아계시더라면 돌아가신 우리 아빠와 비슷한 연배..

좋은 제자와 글을 많이 남기셨으나 아직은 아쉬운 나이다..

오늘 처음 뵈었지만 글에서 쓰셨듯이 환한 세상에서 평화와 영복을 누리시길 바라본다.. 아니 누리시고 계실 것 같다.





“어차피 세월은 흐르고 지구에 중력이 존재하는 한 몸은 쭈글쭈글 늙어 가고 살은 늘어지게 마련이다. 내가 죽고 난 후 장영희가 지상에 왔다 간 흔적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차피 지구 상의 65억 인구 중에 내가 태어났다 가는 것은 아주 보잘것없는 작은 덤일 뿐이다. 그러나 이왕 덤인 김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덤이 아니라, 없어도 좋으나 있으니 더 좋은 덤이 되고 싶다... 중략..

 그래서 먼 훗날. 내가 이 땅에서 사라진 어느 가을날, 내 제자나 이 책의 독자 중 한 명이 나보다 조금 빨리 가슴에 휑한 바람 한 줄기를 느끼면서 “내가 살아 보니까 그때 장영희 말이 맞더라”라고 말하면 그거야말로 내가 덤으로 이 땅에 다녀간 작은 보람이 아닐까.”


오늘 읽었기에 살아보니 장 교수님 말이 맞더군요. 하지는 못하지만 글들을 읽으면서 가슴에 휑한 바람 한 줄기와 함께 많은 공감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마침 가을이다.

나 같은 초보 독자 외에도 수많은 독자들과 가족이 기억하고 계시니 큰 보람을 느끼셔도 될 듯하다.


책을 많이 읽는 편이지만, 깊게 읽는 편은 아니고 서평 쓸 시간에 한 권 더 읽자 주의였기에 처음으로 남겨본다.


항상 힘들 때 눈앞에 길이 막힌 것 같을 때 신기하게 책장 속 먼지 낀 책들이 눈에 띄곤 했다.

오늘 이 책이 그랬고, 다시 한번 내 마음을 단단하게 먹게 되었으며 나 자신을 인정하게 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모든 좋은 책이 그렇듯이, 다른 좋은 책을 읽고 싶단 강한 의지도 받게 되었다.


이게 바로 책의 힘이고 내가 책을 찾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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