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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치 Mar 07. 2020

모녀 삼대; 나트랑으로 떠나다 - 여행 준비

엄마, 나, 딸의 첫 해외여행

난 늘 딸과 둘이 여행을 떠났다.

다른 이유보다 같이 여행을 다닐 사람이 없었다.


아이가 있는 친구들과는 시간을 맞추기 힘들었고, 아이가 없는 친구들과는 아이랑 가는 여행 자체가 부담이기에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린 늘 둘이었다.


작년, 아빠가 하늘나라에 가시고 엄마가 혼자 남으셨다.


이전에도 엄마와 같이 가려했었지만, 집에 혼자 남을 아빠 생각에 선뜻 같이 떠나지 못하셨는데..

이젠 아이와 내가 여행을 가면 엄마가 집에 혼자 남게 되신다. 그래서 자연스레 이제 셋이 떠나게 되었다.





어디로 갈까?

아빠가 떠나시고 모두들 마음도 주변도 정리될 무렵, 어딘가 여행을 다녀오면 좋겠다 싶었다.

그러다 우리는 집 공사를 강행하였고 그렇게 여름과 가을이 지나갔다.


짐을 빼고 이사하고 원룸에서 지내며 서로 힘들었던 시간..

벽을 보고 얘기하는 듯한 인테리어 사장님과의 답답했던 공사 진행 과정..

이 시간들을 보내고 집 공사가 끝나자 엄마가 통 크게 한 마디 하셨다.


“내가 쏠 테니 우리 여행 가자!”


그러나 취업 스트레스로 홀가분하게 여행을 준비할 수 없었고 어쩌다 보니 취업하여 여행을 가지 못한 채 2019년을 보내게 되었다.


새로운 회사에 적응이 좀 되가니 슬슬.. 떠나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고 색다른 곳을 가보고 싶었지만 작년 나트랑에 푹 빠진 아이의 고집에 우리는 다시 나트랑으로 떠나게 되었다.




셋이 넷이 되다.

여행을 준비하다 보니 자영업 하느라 여행을 꿈도 못 꾸는 동생네의 막내딸, 딸과 한 살 차이 나는 언니도 같이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 워낙 죽고 못살기도 했고, 딸이 조카 앞에서 여행 다녀온 이야기(자랑)를 할 때면 저 어린아이가 얼마나 부러울까 싶기도 했다.


내가 가진 건 체력과 무모함이니 아이 하나쯤은 충분히 더 데리고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생도 고민 끝에 아이를 보내기로 했고 그렇게 넷의 여행을 준비하게 되었다.


하지만 부모 없이 조카를 데리고 가는 여행은 쉽지 않았다.

아이를 이모가 데리고 간다는 동의서를 베트남어로 작성해서 대사관의 공증을 받아야 했다.


내 딸과 가는 데에도, 아빠 없이 여행 갈 때 엄마와 아이가 성이 다르면 영문 등본을 준비해야 하니 조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사실.. 나와 딸은 본이 다른 같은 성이고, 심지어 조카 또한 본이 다른 같은 성이다. 즉, 영문 성이 모두 같다.

검사를 안 할 확률이 훨씬 높지만 그래도 서류를 준비 못해 여행을 망칠 순 없기에 부르는 게 값인 여러 대행사들 중 하나를 통해 이모가 조카를 데려간다는 동의서를 공증받았다.(6만 원 들었다.)





스케일이 다른 여행 준비

딸과 둘이 여행을 갈 땐, 2인이기에 가장 작은 방을 예약해도 되었고 어떤 추가 요금도 없었다.

그런데 엄마와 큰 편에 속하는 조카까지 같이 가게 되니 2룸 또는 트윈베드를 찾아보아야 했고 가격과 룸 크기가 딱 맞아떨어지는 곳을 찾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이 인원들을 내가 혼자 챙겨야 하니 위치도 중요했다.


무조건 시내 접근성이 좋을 것, 그러나 엄마가 좋아하는 자연 속에 있을 것.

그러다 보니 작년에 묵었던 “에바손 아나 만드라”가 적당했다. 걸리는 거라면 방이 작다는 건데 바로 정원과 연결되는 발코니가 있으니 엑스트라 베드 하나를 추가해서 이틀은 자연 속에 묵기로 했고,

나머지 이틀은 넓은 콘도형으로 구했다.


바쁜 와중에 알아보고 또 알아보느라 아주 힘들었다. (거의 예약은 화장실에서 했던 것 같다.)

아이들과 60대 엄마의 취향을 고루 충족시키는 스케줄을 짜는 게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나는 너무 바빴다.

그래도 휴대폰 메모장에 체크리스트를 만들어가며 스케줄을 완성해갔다.





다시 넷에서 셋으로

바쁜 와중에 그래도 여행 준비가 얼추 다 되어갔다.

초반에 조카의 사시 교정 수술을 동생이 깜박한 것을 알게 되었었고 병원에 확인했을 때 문제없다 해서 추진했었었다.

그러다 수술 날이 되어 병원에 가니, 수술 후 2주 안에는 물에도 들어가면 안 되고 충혈이 많이 되어 공항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충격적인 사실..

무엇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슬슬 중국에서 심각해지고 있던 시기였다.


동생은 수술 전날, 고민하다 결국 여행을 포기하였고 속상했지만 눈 수술에 대한 어떤 지식도 없는 내가 무사히 조카를 데리고 다녀올 자신이 없었다.

급하게 네 명으로 예약한 것을 셋으로 변경했지만 모든 항공사, 여행사들이 비상이라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제일 힘들었던  주위의 따가운 시선.

전염병이 퍼지고 있는 상태에서 여행을 추진하는 게 쉽지 않았다.

거의 일을 안 하고 있을 때에는 계속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당시 공항은 방역을 많이 하고 사람도 줄었으며, 나트랑 현지에서도 중국 여행객이 거의 안 보인다는 걸 현지에 다녀온 여행객들을 통해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들과의 접촉이 많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엄마와의 첫 번째 해외여행이기도 했고, 아이의 봄방학과 내 생일을 기념한 여행이기에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 방학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리고, 환불불가 상품이라 3백만 원 가까이의 돈을 그냥 날릴 수 없기도 했다.


그래서 안전하게 유명 관광지는 안 가기로, 쉬는 데 의미를 두기로 하고 추진하였다.

그래도 당시는 서울에 감염자가 20명 안쪽이었고 줄고 있던 상황이었는데도 마음은 편치 않았긴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이 위주로 꼼꼼하게 짐을 싸고 내 짐은 아주 간단히 벗고 지내지만 않게 때려 넣으니 짐 싸기를 마지막으로 여행 준비를 마쳤다.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된다.

안전하고 즐겁게 우리 모녀 삼대의 소중한 추억을 많이 만들 수 있는 여행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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