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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치 Jul 10. 2020

부끄럽지만 고백하는 투병 준비의 한 달

아플까 봐, 아파서 일을 못할까 봐..

한 달 간의 마음 졸임을 끝내고 보상으로 아메리카노 라지 사이즈와 달달한 마카롱을 시켰다.

커피와 함께 나에게 주어진 한 시간의 자유시간을 요 근래 내 심정과 허튼짓을 기록하는데 쓰려한다.



지난달, 바쁘게 일하고 있던 중 건강검진을 했던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내시경 중 십이지장과 위에서 염증과 용종이 발견되어 조직검사를 했고 결과가 나왔으나,

위는 단순 위염이지만 십이지장에서 재생 이형성 세포가 발견되었으니 대학병원 가서 재검사를 해봐라..라는 것.


조직검사는 이전에도 몇 번 해봤고, 늘 염증 소견만 나왔기에 아예 생각도 안 하고 있다가 머리가 멍 해지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재생 이형성 세포 = 모르는(무서운) 의학 용어, 대학병원 = 일반 병원에서 못 고치는 큰 병을 가진 환자가 다니는 병원”

다른 것보다 의학 일자무식 나에게 저 두 단어가 주는 공포는 결코 작지 않았다.


차분히 재검사를 위한 준비를 했다.

1. 검진 병원에 가서 자료 받아 오기

2. 대학병원 예약하기

3. 휴가 내기


다행히 일주일 뒤 예약을 잡을 수 있었다.


그래도 그 일주일 동안 나는, 아무것도 아닐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과 힘센 암 가족력이 있으니 암일까 걱정되는 마음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잘 잊는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일상생활을 즐기다가 갑자기 ‘아.. 나 우울해야 하는 거잖아. 암일지도 모르는데..’ 하며 우울 모드로 스위치.

그러다 바빠지면 또 잊고, 재밌으면 깔깔대고 긍정 모드로 스위치.


우울 모드일   머릿속을  채운 어이없는 걱정들

지금 나는 얼마가 있지? (만약에 암이라 수술하고 체력이 떨어져 일도 쉬어야 하면 우리 집은 누가 먹여 살리지?)

보험금은 얼마려나? (그걸로 얼마나 버틸 수 있지?)

보험 수혜자를 아이에서 엄마로 바꿔야겠다. (너무 앞서간 것 인정. 그러나 미성년자인 아이에게 보험금이 지급되면 안 되는 큰 이유가 있다.)

나는 아빠를 꼭 닮았어. (아빠의 섬세한 부분, 고민을 혼자 삭히는 점, 상황을 냉정하게 꼼꼼히 바라보는 점, 음주가무를 아주 좋아하는 점, 끈기가 없는 것 등등.. 아빠와 나는 참 많이 멀었지만 사실 가장 닮았다. 그래서 아빠가 안고 간 그 병을 내가 걸려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아빠는 40대 중반에 위암 말기셨다.)


그리고 가장 큰 걱정은, 우리 아이. 형제도 없고 나랑 외할머니뿐인데.. 내가 아파서 또는 죽으면?

우리 아이 힘들어서 어쩌지.. (눈물 한 번 닦고..)


그래서 준비를 했다.


아플까 봐, 죽을까 봐.. 내가  준비들

현금을 모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현금들을 한 곳에 모으고, 자산 현황 체크.. 음 자산관리고 뭐고 자산이 별로 없군)

현금을 벌었다. (쓰지 않는 물건들이 집에 너무 많았다. 당근 마켓에 모두 팔고 자잘한 현금이라도 다 모았다.)

적금을 가입했다. (아직 일할 수 있을 때 모으자. 여러 개의 적금을 한 날 가입했다.)

주변을 정리했다. (내가 갑자기 입원을 한다거나, 세상을 떠난다면.. 누군가 내 짐을 정리할 텐데.. 지저분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주말만 되면 뭐 버릴 거 없나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녔다. 덕분에 집이 깔끔해졌다.)




그러나(다행히) 그냥 염증입니다.

의사를 처음 만나는 데 1주, 내시경 검사를 하는 데 2주, 그리고 결과를 듣는 데 1주. 총 4주 만에 그 “재생 이형성 세포”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바로 오늘)


휴가까지 내고 만난 의사는 어쩜 그리 차갑고 불친절 하신지, 정말 단답형으로 1분도 안 걸리는 아니 30초도 안 걸리는 진료로 날 더 힘들게 했었다.

첫날은 “재검사해보죠. 내시경 예약하시고 가세요”, 검사 때는 나는 수면 중, 그리고 오늘은..

“지난번 검진 병원에서 했던 그 부위를 다시 조직검사했고, 결과는 그냥 염증이에요. 1년 후에 다시 보시죠.”


우선 암이 아니라는데 큰 안도감이 들었지만, “이게 끝?”, 동생이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라고 했는데 뭘 물어봐야 하지? 하며 머릿속이 하얗게 돼버렸다.

의사가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면 질문거리가 생각이 날 텐데.. 결국 그 짧은 시간 동안 생각해 낸 것은..

선생님 약은 안 먹어도 되나요?”

네. 약 없어요”


의사의 차가움에 좀 섭섭했지만.. 그래도 우선 큰 병이 아니라 다행이다. (1년 후엔 다른 의사를 찾아가리)


시간을  느낌이다.

다행히 단순 염증이었지만, 큰 병은 누구나 걸릴 수 있다.

좀 오버하긴 했지만 내가 한 걱정들과 준비는 쓸모없지 않았다. 사람일은 누구도 모르는 거기 때문에...


나는 정말 감정에 휘둘리는 타입이라, 힘들면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날 힘들게 하며 살기도 했는데 미리 해 본 투병 체험은 내 삶에 여러 해답을 던져 주었다.


내가 아팠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미리 떠올려 볼 수 있었고.

내가 얼마나 미래에 대한 준비를 안 해놓고 살고 있는지 점검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사랑스럽고 약한 우리 아이와 엄마를 지키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내 건강이라는 것도..


당장 아픈 게 아니기에, 일을 그만둘 필요도 없고 수술 같은 걸 받을 일도 없다.

그냥 평소처럼 열심히 살고, 이전에 나쁜 습관들을 고치고 좀 더 미래를 준비하고 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내면 된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번 것 같다. 언젠가 진짜 병에 걸릴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불안해하지 않고 치료에만 집중할 수 있게 준비해야겠다.

물론, 건강을 잘 챙겨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늙어야겠지만요.



그리고.. 고맙습니다.

주변에 나보다 더 걱정해주고 챙겨주던 우리 가족들, 친구들.. 그들의 진심을 알게 되어 한없이 고마웠던 시간..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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