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플까 봐, 아파서 일을 못할까 봐..
한 달 간의 마음 졸임을 끝내고 보상으로 아메리카노 라지 사이즈와 달달한 마카롱을 시켰다.
커피와 함께 나에게 주어진 한 시간의 자유시간을 요 근래 내 심정과 허튼짓을 기록하는데 쓰려한다.
지난달, 바쁘게 일하고 있던 중 건강검진을 했던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내시경 중 십이지장과 위에서 염증과 용종이 발견되어 조직검사를 했고 결과가 나왔으나,
위는 단순 위염이지만 십이지장에서 재생 이형성 세포가 발견되었으니 대학병원 가서 재검사를 해봐라..라는 것.
조직검사는 이전에도 몇 번 해봤고, 늘 염증 소견만 나왔기에 아예 생각도 안 하고 있다가 머리가 멍 해지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재생 이형성 세포 = 모르는(무서운) 의학 용어, 대학병원 = 일반 병원에서 못 고치는 큰 병을 가진 환자가 다니는 병원”
다른 것보다 의학 일자무식 나에게 저 두 단어가 주는 공포는 결코 작지 않았다.
차분히 재검사를 위한 준비를 했다.
1. 검진 병원에 가서 자료 받아 오기
2. 대학병원 예약하기
3. 휴가 내기
다행히 일주일 뒤 예약을 잡을 수 있었다.
그래도 그 일주일 동안 나는, 아무것도 아닐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과 힘센 암 가족력이 있으니 암일까 걱정되는 마음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잘 잊는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일상생활을 즐기다가 갑자기 ‘아.. 나 우울해야 하는 거잖아. 암일지도 모르는데..’ 하며 우울 모드로 스위치.
그러다 바빠지면 또 잊고, 재밌으면 깔깔대고 긍정 모드로 스위치.
지금 나는 얼마가 있지? (만약에 암이라 수술하고 체력이 떨어져 일도 쉬어야 하면 우리 집은 누가 먹여 살리지?)
보험금은 얼마려나? (그걸로 얼마나 버틸 수 있지?)
보험 수혜자를 아이에서 엄마로 바꿔야겠다. (너무 앞서간 것 인정. 그러나 미성년자인 아이에게 보험금이 지급되면 안 되는 큰 이유가 있다.)
나는 아빠를 꼭 닮았어. (아빠의 섬세한 부분, 고민을 혼자 삭히는 점, 상황을 냉정하게 꼼꼼히 바라보는 점, 음주가무를 아주 좋아하는 점, 끈기가 없는 것 등등.. 아빠와 나는 참 많이 멀었지만 사실 가장 닮았다. 그래서 아빠가 안고 간 그 병을 내가 걸려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아빠는 40대 중반에 위암 말기셨다.)
그리고 가장 큰 걱정은, 우리 아이. 형제도 없고 나랑 외할머니뿐인데.. 내가 아파서 또는 죽으면?
우리 아이 힘들어서 어쩌지.. (눈물 한 번 닦고..)
그래서 준비를 했다.
현금을 모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현금들을 한 곳에 모으고, 자산 현황 체크.. 음 자산관리고 뭐고 자산이 별로 없군)
현금을 벌었다. (쓰지 않는 물건들이 집에 너무 많았다. 당근 마켓에 모두 팔고 자잘한 현금이라도 다 모았다.)
적금을 가입했다. (아직 일할 수 있을 때 모으자. 여러 개의 적금을 한 날 가입했다.)
주변을 정리했다. (내가 갑자기 입원을 한다거나, 세상을 떠난다면.. 누군가 내 짐을 정리할 텐데.. 지저분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주말만 되면 뭐 버릴 거 없나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녔다. 덕분에 집이 깔끔해졌다.)
의사를 처음 만나는 데 1주, 내시경 검사를 하는 데 2주, 그리고 결과를 듣는 데 1주. 총 4주 만에 그 “재생 이형성 세포”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바로 오늘)
휴가까지 내고 만난 의사는 어쩜 그리 차갑고 불친절 하신지, 정말 단답형으로 1분도 안 걸리는 아니 30초도 안 걸리는 진료로 날 더 힘들게 했었다.
첫날은 “재검사해보죠. 내시경 예약하시고 가세요”, 검사 때는 나는 수면 중, 그리고 오늘은..
“지난번 검진 병원에서 했던 그 부위를 다시 조직검사했고, 결과는 그냥 염증이에요. 1년 후에 다시 보시죠.”
우선 암이 아니라는데 큰 안도감이 들었지만, “이게 끝?”, 동생이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라고 했는데 뭘 물어봐야 하지? 하며 머릿속이 하얗게 돼버렸다.
의사가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면 질문거리가 생각이 날 텐데.. 결국 그 짧은 시간 동안 생각해 낸 것은..
“선생님 약은 안 먹어도 되나요?”
“네. 약 없어요”
의사의 차가움에 좀 섭섭했지만.. 그래도 우선 큰 병이 아니라 다행이다. (1년 후엔 다른 의사를 찾아가리)
다행히 단순 염증이었지만, 큰 병은 누구나 걸릴 수 있다.
좀 오버하긴 했지만 내가 한 걱정들과 준비는 쓸모없지 않았다. 사람일은 누구도 모르는 거기 때문에...
나는 정말 감정에 휘둘리는 타입이라, 힘들면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날 힘들게 하며 살기도 했는데 미리 해 본 투병 체험은 내 삶에 여러 해답을 던져 주었다.
내가 아팠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미리 떠올려 볼 수 있었고.
내가 얼마나 미래에 대한 준비를 안 해놓고 살고 있는지 점검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사랑스럽고 약한 우리 아이와 엄마를 지키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내 건강이라는 것도..
당장 아픈 게 아니기에, 일을 그만둘 필요도 없고 수술 같은 걸 받을 일도 없다.
그냥 평소처럼 열심히 살고, 이전에 나쁜 습관들을 고치고 좀 더 미래를 준비하고 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내면 된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번 것 같다. 언젠가 진짜 병에 걸릴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불안해하지 않고 치료에만 집중할 수 있게 준비해야겠다.
물론, 건강을 잘 챙겨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늙어야겠지만요.
주변에 나보다 더 걱정해주고 챙겨주던 우리 가족들, 친구들.. 그들의 진심을 알게 되어 한없이 고마웠던 시간.. 잊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