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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치 Aug 17. 2023

오사카에서 잠시 멈춤

등교거부, 방학

우리가 이 상태로 여행을 갈 수 있을까? 간다 하더라도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는 왜 가는 거지? 무얼 하러 가는 걸까?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떠다녔지만, 단 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그 생각만으로 7일간의 일본 여행 계획을 세웠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아이와 단 둘이 있기만 하자. 그래도 욕심을 내 본다면, 항상 든든하게 지켜주는 엄마가 있다는 것에 아이가 조금이나마 위안을 느꼈으면 좋겠다.




2023.07.30 - 08.01 난바

공항으로 가는 길은 늘 설렌다. 그러나 이 날은 설렘보다는 신기함이 더 느껴졌다. 컴컴한 방에서 웅크리고 있던 아이가 조수석에 앉아 심드렁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보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다. 수 없이 보았던 모습인데 왜 특별할까? 그동안의 일이 다 꿈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일주일간의 여행 시작이 나쁘지 않다. 기운은 없어 보였지만, 큰 짜증 안 내고 호텔까지 잘 따라왔다.


그러나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아이 컨디션은 눈에 보이게 떨어졌고, 방에서 쉬고 싶어 했다. 집안에서만 거의 두 달을 생활했으니 이해도 된다. 그래서 첫날 저녁은 근처 몰에서 돈가스 도시락을 사 와서 먹고, 다음 날엔 근처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지금도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이틀이면 질린다는 미국 호텔 조식을 3주 출장 기간 동안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먹은 나는 진정한 조식파다. 그런 내가 호텔 조식을 신청하지 않은 건, 아이와 시간을 맞추는 게 힘든 걸 여러 번의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랄까. 느릿느릿한 아이의 시간은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본전 생각에 기름을 붓는다. 그건 우리에게 별로 좋지 않기에 과감히 조식을 신청하지 않았다. 점심을 맛있게 먹으면 되지 뭐!


꽤 게을렀던 적이 있던 것 같은데, 언젠가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버린 나는 아침부터 단장을 하고 외출 준비를 했으나 아이는 나갈 생각이 없다. 오늘은 좀 돌아다녀도 될 것 같은데 아쉽다. 아이는 로블록스 맵 만들기 삼매경이었는데, 나름 보스가 되어 직원들을 꾸려 일을 시키고 점검하느라 바쁘다. 선생님들이 걱정하던 우울한 글이나 SNS에 빠져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마음은 편해졌으나 부지런한 몸이 불편하다. 나가고 싶다. 호텔이 난카이 난바역 주변이라 전에 구경하지 못해 아쉬웠던 주방용품 시장을 가볍게 돌아보기로 한다. 호텔 앞은 고급 쇼핑몰들이 너무 잘 꾸며져 있었고, 아이가 좋아할 만한 아이스크림과 피자, 파스타를 파는 가게들이 눈에 띈다. 점심 메뉴로 가야겠다며 아이를 유혹할 사진도 찍어 놨으나 우리는 결국 또 편의점에서 해결했다. 방 청소 해야 한다는 핑계로 억지로 데리고 나갔으나 아이는 너무 피곤해했고, 바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이는 또 초저녁에 잠이 들었다.


아이가 언제 깰지 모르니 잠시 외출을 할 수도 없고, 편의점 음식은 영 입에 안 맞아 와인만 홀짝 거리며 배고픈 속을 달랬다. 그래도 너무 멋진 오사카의 야경과 곤히 자는 아이의 모습은 오랜만에 평화롭다는 감정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2023.08.01 - 08.02 나라

다음 날 우리는 나라로 이동했다. 사슴들이 길에 돌아다닌다는 그곳에 이전부터 가보고 싶었다. 볼 것 없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꼭 가보고 싶던 나라, 동물을 좋아하는 아이가 좋아했으면 좋겠다. 지하철을 여러 번 갈아타고 긴테쓰 나라역에 도착했다. 마침 호텔 가는 길에 맛집이라는 스테이크 덮밥집이 있어 그곳에서 점심을 먹으려 했는데 아이는 돈가스를 먹고 싶다고 한다. 일본에 온 지 벌써 3일째인데, 제대로 식당에서 밥 한 끼 못 먹었는데 돈가스면 어떠리. (나는 돈가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소스를 담는 작은 절구에 깨를 가는 아이의 모습이 귀엽다. 맛있게 밥을 먹고 호텔에 짐을 맡겨둔 뒤, 근처를 구경하려던 원래 계획과 달리 태양은 너무 뜨겁고 강렬했다. 체크인 시간까지 로비에서 시간을 보낸 뒤 옛날 일본 스타일 방에 들어갔고 아이는 역시 또 로블록스를 하다 초저녁에 잠이 들었다. 호수가 보이는 스타벅스에서 홀로 마신 잠깐의 커피 타임이 유일한 오후의 기억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이대로 떠나기엔 아쉽다. 새벽에 일어나 이미 하루를 시작한 아이에게 일정 중 유일하게 신청했던 조식을 먹으러 가자 하니 순순히 따라나선다. 정성스러운 료칸식 식사에 아이는 평소 선호도랑 상관없이 맛있게 밥을 먹고, 기회를 타 사슴을 보러 갔다. 이른 아침이라 간신히 한 무리를 보았는데, 귀엽고 사랑스러울 거란 기대와 달리 먹이용 센베를 내놓으라며 건방지다. 이 구역의 깡패 같다. 그래도 나라에 와서 사슴을 보았으니 되었다. 사슴도 보았으니 어제 못한 온천할래? 하니 또 생각지도 못하게 끄덕거린다. 기겁을 할 거란 예상과 달리 유카타도 입고 온천으로 이동해 우리는 나란히 목욕도 하고 노천탕도 즐겼다. 더운 날씨라 짧게 있었지만, 늘 날이 서있던 아이와 하늘을 보며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근 그 순간이 참 좋았다. 잘못 본 걸 수도 있는데, 아이가 살짝 웃는 걸 본 것 같기도 하다.


긴테쓰 나라역에서 맘에 드는 향수를 산 아이는 꽤 기분이 좋다.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았는데 향기가 좋고, 그걸 갖고 싶은 일반적인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된 것 같아 기꺼이 사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교토로 향했다.




2023.08.03 - 08.04 교토

하루 한 끼 제대로 된 식사하기가 일본 여행에서 꽤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체크인 시간이 되기까지가 절호의 기회다. 마침 호텔은 신풍관 내에 위치해 있고, 그곳엔 먹음직스럽고 보기에도 좋은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또 돈가스를 먹길 원했고, 검색해 보니 근처에 평점이 좋은 데가 있어 찾아갔다. 뜨겁고 그늘도 없는 곳을 10분 이상 걸어 아이는 꽤 힘들 텐데도 빨리 먹고 싶다 난리다. (배 좀 고픈가 보지?) 와.. 돈가스가 이런 맛이구나. 돈가스를 좋아하지 않던 나도 고개가 숙여졌다. 아이는 이제 1일 1 돈가스 할 거라며, 오늘은 3 가스라며 농담도 한다. (농담은 현실이 되어 6 가스를 달성했다.)


요즘 말로, 힙함 그 자체인 호텔이 있는 건물이라 그런지 신풍관엔 꽤 욕심나는 물건을 파는 샵들이 많다. 특히, 트레블러스 팩토리에서 파는 가죽 수첩과 소품들은 정말 다 갖고 싶을 정도다. 역시 여행은 돈이 있어야 해서, 여행자들은 다 부자인 건지 가격들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아이에게 기억에 남는 선물을 해주고 싶었기에 많은 것들을 골랐지만 기분 좋게 결제도 해주었다. 평생 쓸 수 있을 것 같은 그 수첩에 좋은 기억을 기록하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아이는 또 초저녁에 잠이 들었다. 교토를 좋아하는 팀원이 맛집, 쇼핑, 관광 리스트를 잔뜩 보내줬었지만 단 한 곳도 갈 수 없었다. 처음이랑 달라진 것은 아이가 잠들면 안절부절못하고 시간만 보내는 게 아니라 소리를 죽여 넷플릭스 드라마를 정주행 했다는 것. 드라마 두 개를 다 끝내고 왔으니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음은 더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룸 청소시간에 잠시 나가 점심을 먹고 간단한 쇼핑을 하고, 아이는 방에서 놀고 나는 잠시 외출을 하고, 아이는 초저녁에 잠들고 나는 드라마를 보고.. 계속 그런 루틴으로 교토에서의 시간을 보냈다. 처음엔 어딘가 가야 할 것 같고,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올라와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했는데 ‘둘이 있는 것에 집중하자’는 초심을 떠올리며 조급한 마음을 달랬었다.



2023.08.04 집으로

일주일이 꽤 긴 것 같았는데, 항상 그렇듯이 돌아가는 길은 아쉽다. 이번엔 약간의 두려움도 보태졌다. 집에 돌아가면 더 좋아질까? 아니면 다시 돌아갈까? 복잡하다. 그래도 한 동안 잘 씻지도 않던 아이가 매일매일 샤워하고, 밥도 맛있게 먹었으며 웃기도 하고 아주 가끔 농담도 했다. 일단 희망을 갖고 집으로 가본다.


집에 돌아와 일주일간 못 본 밍밍이와의 찐한 재회를 한 뒤 아이의 방문은 다시 닫혔다.




다녀온 지 벌써 2주가 지난 지금, 날씨로 표현하자면 태풍 초반 정도 될 것 같다. 개학이라는 현실이 점점 더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나의 가슴떨림과 입병도 다시 시작되었다. 그래도 이 여행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학교를 보내야만 하는 나와 학교에 가기 힘든 아이의 폭풍 같은 상황에서 잠시 멈춤 버튼이 눌려졌던 시간이기 때문이다. 재미는 없었지만, 그 순간은 고요했고 평화로웠다.


지금은 엄마를 공격하는 것으로 자기를 방어하고 있지만, 어색한 일본어로 인사를 하는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은 진정 사랑이었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래야 버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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