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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치 Aug 10. 2023

잠시 맑음, 이것도 다 지나가리오

등교 거부 73일~, 방문이 열린 그날

'오사카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호텔에서 곤히 자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눈물 나게 사랑스럽다'까지 쓰고 열흘의 시간이 흘렀다. 지금은 여행을 같이 떠난 아이에게 사랑스러움을 느끼기보다는 여전히 내 기준에서 폐인 같은 행동에 원망이 올라온다. 글을 남기는 순간만큼은 내 감정에 솔직하고 싶다.



2023.07.22-25 (73-76일째)

살면서 이렇게 힘든 적이 있었을까? 친한 친구가 여행 갔다고 학교를 못 가? 마스크 벗기 싫어서 졸업앨범을 찍기 싫어? 네 얼굴 아무도 안 본다니까? 정 싫으면 안 찍어도 된다고 했는데도 촬영기간 내내 괴로워하는 아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아이는 왜 이리 예민하여 이런 사소한 일로 신경 쓰게 할까? 하는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아이에겐 사소한 일이 아니었고 상태는 급격하게 안 좋아졌다. 컴컴한 방 안에서 하루 한 번 잠시 나와 죽지 않을 정도의 음식만 먹고 들어간다. 씻지도 푹 자지도 못한다. 사나워도 본인의 의사만큼은 명확하던 아이가 소위 영혼이 없는 것처럼 변해갔다. 그때도 난 갈피를 못 잡았다. 아이가 문제인가? 내가 문제인가? 난 열심히 살았고, 아이와 시간도 많이 보낸 것 같은데… 원인이 뭘까?


아이가 삶의 끈을 놓아버린 듯 방에서 나오지도 씻지도 먹지도 자지도 않는다. 이전엔 속옷을 너무 자주 갈아입어 빨래하기 바빴고 치약 뚜껑은 항상 닫지 않아 아침저녁 내가 닫아주는 게 일이었다. 그러나 아이의 빨랫감은 나오지 않고 치약도 칫솔도 바짝 마른 채 늘 그 자리에 있다.


무수히 노크하여 간신히 하루 한 끼는 먹이지만 우울감에 가득 찬 아이를 나오게 하긴 힘들었다. 일할 땐 티 안 내려하지만 퇴근하면 무너지는 나날들.. 도저히 이대론 안 되겠다. 무엇보다 저러다 아이가 잘못될까 두렵다. 아이 건강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할까.


퇴근하자마자 아이 방문 앞에서 계속 말을 걸었다.

"엄마가 네가 친구들 때문에 그렇게 힘든 걸 몰랐어. 그냥 지나가는 문제인 줄 알았어."

방에선 대답이 없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을 걸었다. 그리고 4시간쯤 흘러 툭 하고 방문이 열렸다. 꽤 깔끔하지 못한 아이의 모습에 놀랐지만, 그 눈빛마저 너무 사랑스러웠다. 방문을 연건 네 마음이 조금 열렸단 의미라고 생각해도 될까?


12시가 다 되어 피자를 먹으며 다음 날 병원에 가는 것에 대해 상기시켜 주자 무심히 끄덕인다. 이미 취소 요청을 했지만 여행사의 늦은 처리로 항공권이 아직 살아있기에 여행의사를 묻자 가고 싶다고도 한다. 기대도 안 했는데 뜻밖의 수확이다. 바로 항공사에 철회취소글을 남기고 호텔을 다시 예약했다. 당일이 되어 아이 마음이 바뀔 확률이 높지만, 여행비를 모두 날려도 된다는 내 나름의 도박이었다.


2023. 07. 26 (방학이라 잠시 등교 거부 카운팅은 하지 않습니다.)

아이 병원을 가기 위해 휴가를 내고 아침에 그동안 미루었던 엔진오일을 갈러 카센터에 다녀왔다. 차 수리 동안 아이와 한참 카톡을 했는데, 그 전날 끄덕이며 병원에 가겠다던 아이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가 왜 가야 해? 내가 정신병자야? 엄마가 얘기한 마음의 감기? 그건 유치원생한테나 통하는 거야"

TV에서 보던 정신병원과 달리 우리가 가는 곳은 외국에서 흔한 마음이 힘들 때 가는 클리닉이라고 여러 번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다. 거의 반 포기 상태로 집에 돌아와 10년 넘게 다닌 소아 청소년과 병원에 전화를 했다.


"선생님, 제가 인터넷에서 보니 소아 청소년과에서도 정신과 처방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 그동안의 이야기 전달...) 아이가 혹시 오늘 병원에 못 가면, 선생님 병원에서 처방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건 힘듭니다. 아이 상태가 그 정도면 어떻게든 전문 병원에 데려가야 해요."


정말 지독하게 안 먹고, 예민하던 아이지만 이 아이는 똑똑해서 그런 거라며 아이 편을 들어주시던 선생님 말씀이시라 더 신뢰가 가고 조급해졌다. 한 달이나 기다린 예약이기에 어떻게든 병원에 데려가야 했다. 그러나 거부만 하는 아이를 데려갈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안되면 말지' 하는 마음으로 시끌벅적한 게임소리가 들리는 방문에 가까이 대고 말했다.


"병원에 가면 로벅스 충전해 줄게."

"얼마 해줄 건데?"

"(잠시 고민하다) 10만 원!"


갑자기 아이 방문이 열리더니, 그렇게도 안 씻고 폐인 같던 아이가 화장실로 뛰어 들어간다. 거울 보기 힘들어 못 씻는 건가 싶어서 욕실 거울에 붙여놨던 돗자리도 휙 떼어내고 씻기 시작한다.


'뭐야, 이렇게 쉬운 거였어?'

얼굴이 싫어 거울 보기 싫다는, 머리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들다며 짜증만 내던 아이가 무심하게 머리를 쓱쓱 빗고 따라나섰다. 그러면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미리 20만 원가량을 더 충전해 달라고 요구한다. 우울증에 방에 처박힌 게 아니었나? 단지 게임에 빠진 걸까?  혼란스러울 찰나 아이가 씻고 나선 것에 기분 좋아진 엄마(외할머니)께서 '그거 내가 해줄게! 얼마야!'를 외치고 말았다. 하아.. 엄마.. 그런 키는 정말 아껴야 하는데...


결국, 아이는 30만 원가량의 게임 머니를 획득해서 그런지 병원 상담을 순순히 받았다. 따로따로 상담해서 아이가 어떤 상황인지 듣지 못한 채 불안을 낮추는데 도움이 된다는 가벼운 약처방만 받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후로도 아이의 패턴은 바뀌지 않았고, 간신히 약을 먹이는 날들이었지만 그래도 방 안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때보다는 낫다고 정신승리하며 여행을 기다렸다.



2023.07.30

출발 전까지 아이가 잠에 빠졌거나 게임하느라 가기 싫다고 버티거나 하는 상황 대비를 수 없이 했다. 어떤 설득에도 힘들면 힘 빼지 말고 배웠다 셈 치며 여행비 정도는 포기하자고 나 스스로 타협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아이는 순순히 따라나섰고, 늦지 않게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거기엔 낮밤이 바뀌었던 패턴에서 하루종일 비몽사몽 깨있다 잠깐씩 쪽잠을 자는 패턴으로 바뀐 덕을 본 것도 있다.  맑은 상태는 아니어도 오전에 깨있기 때문에 데리고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무거워도 로블록스 맵을 만들기 위한 노트북을 들고 간 것도 한 몫했다.


지금도 여행에 대한 설렘은 없어 보였는데 왜 순순히 따라나섰는지 의문이지만, 무사히 출발했고 오사카 난바의 호텔에도 무사히 도착했다. 다만, 체크인하려 하는데 아이 상태가 좋지 않다. 못 먹고 잘 자지 못했던 아이가 오랜만에 식사도 하고 외출해서 그런 건지, 배가 아프다고 한다. 일단 방에 들여보내놓고 근처 드럭스토어 약사에게 파파고를 돌려 아이가 먹을 약을 간신히 사서 들어오니 아프단 아이가 맞나 싶게 노트북을 켜 맵을 만들고 휴대폰으로 채팅하느라 정신이 없다.


근처에 맛집에서 저녁을 먹을 거란 내 기대와 달리 아이는 외출을 거부했고, 돈가스 도시락을 먹고 초저녁부터 잠에 빠졌다. 항상 아이와 여행 다니며 내가 시녀인가 하는 자괴감이 올라올 때가 제일 힘든데, 그래도 이번엔 밝은 표정으로 놀다가 잠이 든 것만도 고맙게 생각해야지 하며 그렇게 나를 다독이며 오사카의 첫 밤을 보냈다. 이 와중에 호텔의 야경은 참 멋졌다.




수많은 육아서와 강의에서 아이에게 보상을 제시하지 말라고 한다.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우선 병원에 가야 아이가 치료가 필요한 상태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텐데 기회를 놓치기엔 요즘 마음이 아픈 아이들이 많아 어렵게 잡은 예약의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그래서, 아이가 최근 빠진 게임 머니로 딜을 했고 결과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집 밖에 나왔고 약도 먹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후의 상황을 봐서도 아이가 약이 필요한 상황인 건지, 사춘기인 건지, 단순히 게임 중독인 건지.. 아직 파악이 잘 안 된다. 사실 아직도 매일매일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시한폭탄 같은 삶도 언젠간 편해질 것을 나름의 40년 이상의 삶을 살면서 깨달은 것이기에 이것도 다 지나가리오.. 하며 화 안 내고 버티기 시전 중이다.


이것도 다 지나가리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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