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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치 Aug 23. 2023

다시 마주한 현실은 쓰다

등교거부, 개학이 다가오다

일주일간 오사카에서 딱히 뭔가 한 게 없었지만 그저 평화로웠다. 하루 한 끼, 제대로 먹는 식사 후 만족감에 그렇게 먹이기 힘들었던 우울증 약도 잘 먹어주었다. 약간의 희망을 갖고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2023.08.06 - 15

날짜를 쓰면서 놀랐다. 이전 글에서 이미 2주가 지났다고 썼는데 오늘이 딱 2주가 되는 날이었다. 내 마음속 시간의 부피는 실제와 차이가 컸다.


우려했던 것처럼,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아이는 다시 문을 잠갔다. 그래도 이전보다 다른 건, 게임맵을 만드느라 바쁘다는 걸 알았다는 것과 식사 때는 나온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재밌는 건, 오사카 돈가스 장인의 맛을 봐서 그런 건지 이미 일주일 동안 여섯 번의 돈가스를 먹었음에도 도착한 날부터 계속해서 돈가스만 시켜서 먹고 있다는 거다. 이 세상 모든 고통을 다 짊어진 우울한 모습으로 돈가스를 챙겨 먹는 모습에 아직은 아이의 순수함이 느껴진다.


나만의 벙커를 다시 찾은 아이는 점점 더 방에 파묻혔고 재택근무 전면 해제로 일주일 내내 경기도 출근을 해야 하는 나는 다시 바빠졌다. 일주일 동안 오픈된 공간에서 24시간 함께 했던 우리는 만나기 힘들어졌다.


그렇게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집에선 등교 실랑이가 필요 없어 편했고, 회사에선 갑작스러운 여행에서 비롯된 일의 공백을 메꾸느라 바쁘게 지냈다.


아이를 24시간 챙기다 갑자기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불안했지만, 믿는 구석은 있었다. 교장선생님이 승인하면, 주소지 변경 없이도 아이가 원하는 전학을 할 수 있다는,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최후의 보루가 있었기 때문이다.



2023.08.16 - 17

개학이 다가온다. 사실, 개학과 동시에 전학시키기 위해 이미 담임 선생님께 전학 절차에 대해 문의한 상태였다. 요즘 여러 사건으로 오해가 있을 수 있어 잠시 설명하자면, 방학 전 선생님들과 만났을 때 방학 동안에는 핫라인으로 담임 선생님께 아이의 상태를 계속 전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선생님께선 회신이 없었고, 그렇게 개학일은 다가왔다. 나중에 해외에 계셔서 연결이 되지 않았단 걸 알았다. 그리고, 돌아오신 선생님을 통해 주소지 변경 없이는 전학이 힘들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개학은 코앞인데 갑자기 막막해진다. 아이도 마찬가지인지 갑자기 더 사나워졌다. 최근엔 매일 먹던 메뉴가  돈가스에서 마라탕으로 바뀌었는데, 미팅 중이라 엄마의 마라탕 주문 요청 연락을 받지 못했었다. 이어서 배달앱을 쓸 줄 모르는 엄마께서 내가 시켰으니 걱정 말라는 연락이 추가로 와있었다. 전화로 주문하신 건가? 여하튼, 잘 마무리되었으니 다행이다.


서울에서 판교 출퇴근, 특히 자차로 퇴근은 정말 시간과의 싸움이다. 두어 시간 막힌 도심을 운전하고 오면 모든 기운이 다 빠진다. 이 날도 후덜 거리는 다리로 집에 오니 엄마께서 밖에 나와 계신다. 마라탕 배달을 기다리고 계신다 한다. 아까 시켰다고 한지 몇 시간 안 되었는데 또? 어지간히 마라탕에 꽂혔나 보구나 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이미 돈가스를 십여 차례 연속해서 먹지 않았던가.


하루를 마무리하고 자려던 그때, 아이가 방에서 나오더니 감자튀김을 해달랜다. 아이가 방에서 나왔는데 잠이 중요할까. 늦은 시간이지만 에어프라이어에 감자튀김을 돌리고 설거지거리가 조금 있길래 설거지를 하는데 빨간 국물이 여기저기 튀어 있다. 말려놓은 그릇에도, 타일에도, 둘러보니 닦은 흔적은 있지만 여기저기 마라탕 국물이 튀긴 게 보인다. 이상하다. 소파에서 감자튀김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에게 오늘 무슨 일 있었냐 물으니 모른다며 귀찮아한다. 재차 물으니 짜증 내며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


왠지 안 자고 있을 것 같은 엄마를 깨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물었다. 참기로 했는데 엄마는 화를 못 참고 만 걸까? 결국 엄마는 낮에 시켜준 마라탕이 원하던 게 아니라고 온갖 짜증과 화를 내던 아이와 씨름하다 아이에게 욕을 들었다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하신다. 나도 그동안의 다짐이 다 무너지며 화가 올라왔다. 어떻게… 어떻게.. 할머니한테 그런 욕을 할 수가 있는 걸까.


오늘은 저 문을 열고야 말겠다며 올라갔으나 말리는 엄마와 실랑이하느라 열진 못했다. 그 안에서 아이의 막말이 쏟아진다.


차마 그 말 들을 여기에 쓸 순 없지만, 아이와 함께 한 모든 시간들이 다 부정당하는 그런 말들이었다. 강제로 문을 열 수도 있었지만 우선 침착해야 했다. 쏟아지는 비난에 내 가슴속엔 눈물이 장대비처럼 쏟아졌다. 이게 말로만 듣던 피눈물이구나.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날이 밝고, 일하러 가고 지친 몸으로 귀가해 아이의 눈치를 보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이 와중에 전학을 위해 이사 갈 집을 찾는데, 갑자기 마련해야 하는 목돈도 문제지만 우선 빈집이 없다. 간신히 다세대주택 꼭대기 방을 구했다. 엘리베이터도 없고 하필 너무 더운 일요일에 수 없이 오르락 거리며 짐을 옮겼다. 덥고 무엇보다 즐거운 이사가 아니기에 기운이 나질 않는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하는 건, 아이는 현재 학교로 돌아갈 생각은 없으며 그나마 전학은 원하기에, 어떻게라도 무사히 초등학교 졸업을 시키고자 하는 간절함 때문이다.


이제 곧 전학을 하게 된다. 아이가 나와의 약속을 꼭 지켜주길 바랄 뿐이다. 다시 가방을 메고 나서는 모습을. 보고 싶다. 오후마다 울리는 알림장 알림에 울컥하지 않고, 편하게 알림장을 열어 보고 싶다.


내일 준비물이 뭘까? 소소한 일상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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