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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치 Aug 26. 2023

나는 너를 참 몰랐구나

등교 거부, 전학 가던 날

금요일 오후, 서둘러 일을 마치고 오후 반차를 내어 전입신고를 했다. 전학을 위해 받은 확인서에는 근처에 있지만 아직은 낯선 초등학교 이름이 찍혀 있다. 6학년 마지막 학기를 보내게 될 그곳에서 아이가 잘 적응하고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게 되길 간절히 기도해 본다. 이어 아이의 교과서와 짐들을 가지러 다니고 있는 학교에 방문했다. 학교 보안관님께 짐을 가져가야 해서 주차가 가능하냐 물으니, 선뜻 문을 열어 주신다.


"꼬마화가 엄마구나. 전학가요? 에고 고생 많았어요. 할머니도 많이 뵈었지. 걱정 많이 하셔서 얼굴이 안 좋으시더라고.. 아이가 전학 가면 잘할 거예요. 힘내요."


4학년 중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등하교를 같이 하던 엄마를 기억하시는 보안관님, 들어가기 싫다며 고집 피던 1학년부터 씩씩하게 혼자 등교하던 최근까지 커온 과정을 다 봐오신 분이다. 따뜻한 미소가 참 인상 깊었던 분의 마지막 말씀이 고마워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건강하세요. 보안관 할아버지.


아이의 교실까지 무거운 마음으로 올라갔고, 상담 선생님께서도 와 계셨지만 더 있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아 짧게 인사만 하고 등을 돌렸다. 어떻게든 아이를 제 자리에 돌아오게 하기 위해 연락을 많이도 주고받았었다. 알게 모르게 동지였지만, 이젠 그분들과 헤어져 나 혼자 해결해야 한다.


"그동안 참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2023.08.25

자기를 소외시켰던 친구들을 보기 힘든 딸이 선택한 길은 전학이었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도 전학이었다. 그래서 이제 새로운 출발을 하면 되는데, 개운치가 않다. 밤낮이 바뀐 아이가 제대로 등교할 수 있을지, 가서 또 등교를 거부하면 어떡할지 걱정이 끊이질 않는다.


학교에서 가져온 짐들을 구석에 밀어두었다가 저녁에야 하나씩 꺼내 보았다. 글쓰기 노트가 눈에 띈다. 그대로 바닥에 앉아 읽기 시작했고, 그동안 산만하여 수업에 잘 참여하지 않고 공부와는 거리가 멀거라는 프레임 안에 아이를 가뒀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는 글씨도 또박또박 잘 썼으며, 무엇보다 글을 꽤 잘 썼다. 어쩜 이렇게 성숙하게 생각할 수 있지? 내가 그동안 아이를 몰랐구나 하는 사실에 마음이 아파 온다. 무엇보다 '가장 후회되는 일'이란 주제의 글에선 코로나가 시작되었을 당시, 자기는 원래 내성적인데 학교에 못 가니 친구들을 만들기 더 힘들어 아까운 시간을 틱톡 같은 SNS를 하며 보내버린 게 가장 후회된다고 쓰여 있었다. 그때 나는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버티는 아이 문제로 꽤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브런치에 글도 여러 번 썼다), 아이도 나름 많이 아팠단 걸, 그걸 잊기 위해 휴대폰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후회스럽다고 느낄 만큼 많이 자랐다는 것도 말이다.


미술 작품을 모아 둔 포트폴리오 파일에선 역시! 할 정도의 멋진 그림들을 볼 수 있었다. 학교엔 미술 재료도 많이 없을 텐데 크레용을 꾹꾹 눌러 그린 한 여자의 초상은 초등학생의 솜씨라고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미완성의 운동화 그림으로 끝이 났다. 아마 운동화 디자인 수업이었던 것 같은데, 오른쪽 운동화를 마무리하던 중 학교에 가기 힘들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이의 흔적에서 성장에 대한 의지와 올바른 가치관,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볼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내 아이를 몰랐었다. 겉으로 보이는 행동과 말만으로, 엄마와 할머니를 하찮게 여기며 말도 못되게 하는 딱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였는데, 그건 어쩌면 내 생각이 만들어 낸 허상일 수도 있겠구나 싶다.


우리는 캠핑도, 여행도 자주 다니며 대화도 많이 한다고 생각했었다. 아이는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고, 나도 아이에게 크게 감추는 게 없이 편하게 얘기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잘 안다고 생각했다. 등교 거부와 별개로 내 아이가 이렇게 잘 자라고 있었는데, 문제 아이 프레임에 가둬 버린 나를 반성했다. 미안해, 엄마가 몰랐어서 정말 미안해.



저녁 시간이 훌쩍 넘어 하루를 시작하는 아이가 돈가스를 시켜달랜다. 아이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돈가스를 먹고 있는 아이에게 요즘 사업은 잘 돼? 하고 물으니 씩 웃으며 두 명이 나갔으나 그래도 잘 되는 편이라고 한다. 한 명은 본인의 영업 비밀?을 갖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고, 나머지 한 명은 모른다고 한다.


아이는 로블록스 맵을 만드는데, 혼자 다 못하니 여러 명을 고용해서 만들고 있다. 디자인과 운영은 딸이, 맵 개발을 도와줄 직원(중학생으로 추정), QA, 홍보 담당까지 나름 작은 조직을 꾸려 운영하고 있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만나는 친구 하나 없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아이의 소통 창구이자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이기에 가끔 게임 머니를 충전해 주며 말없이 지원하고 있다.


오랜만에 본 아이의 웃음이다. 아마도 내 말투도 조금은 달랐을 것 같다. 최근 나도 날이 서있어 다정하게 아이를 부르지 못했다. 월요일 등교에 대해서 운을 떼니 거부감 없이 알았다고 한다. 혹시 몰라 사이즈별로 주문했던 실내화를 신겨 봐도 거부하지 않는다. 우선 아이가 아침에 일어나려면 낮에 활동을 해야 하기에 주말에 이케아에 같이 갈 거냐 물어보니, 같이 가겠다고까지 한다. 아이는 이케아를 좋아한다. 뭔가 또 잔뜩 사들고 오겠지만, 같이 나선다는 것에 내가 더 설렌다. 이렇게 한 발 한 발 다시 세상으로, 아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서 있던 터널에 작은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이가 다시 학교에 갈 거라 생각하니, 나도 새로 시작하는 느낌이다. 오전부터 부지런히 집을 치웠다. 녹아내리는 마음에 나 하나 건사하기 힘들어 집을 방치했더니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다. 개운하게 샤워하라고 욕실도 깨끗하게 청소한 뒤 아이를 깨웠다. 그러나 도대체 언제 잠든 건지, 저녁이 다 돼 가도 아이는 일어날 생각이 없다. 깨우는 게 귀찮은지 이젠 방문마저 잠가버렸다. 오늘 이케아는 글렀다.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는 지금, 사실 설렘보다는 불안함이 좀 더 크다. 그래도 우선 아이를 믿어 보기로 한다. 글 속에 담긴 아이의 진짜 모습을 믿어 보자. 잘할 수 있어, 꼬마화가!


6학년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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