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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인경 Aug 26. 2023

track#8 날씨 때문에


2017-2018년 발매한 12곡의 가사에 대한 이야기를 연작 형태로 적어보려고 합니다. 발매 당시 앨범 소개글에 기초한 글입니다. 일곱 번째 트랙은 <여란한 웃음과 시끄러운 낮의 열기>입니다.




<날씨 때문에>


간밤에 꾸었던 눅눅한 꿈

말라버릴 것 같은 좋은 날이야

이제는 네가 없는 이 마른 거리를

혼자서 걸어가네


날씨 때문에 기분이

좋은 그런 날이면

아무런 약속이 없어도

슬쩍 만나곤 했지


오 너는 이제는 잊혀진 꿈처럼

가물거리겠지만

해마다 이맘때 날씨가 좋은 날

기억나겠지요


날씨 때문에 기분이

좋은 그런 날이면

아무런 계획이 없어도

훌쩍 떠나곤 했지


오 너는 이제는 잊혀진 꿈처럼

가물거리겠지만

해마다 이맘때 날씨가 좋은 날

기억나겠지요

기억나겠지요

기억나겠지요


<날씨 때문에> 감상하기



 

 4월의 제주도 어느 볕 좋은 날이었고, 저는 친구 부부가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 마당에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규모가 작은 숙소이고 주인장 부부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외출 중이었기 때문에 새소리와 바람 소리만 작게 들렸습니다.

 마당에 놓인 의자에 앉아 기타를 치며 흥얼거리던 게 새로운 노래가 되었습니다. 조용한 제주의 마을, 햇볕은 내 등을 덥혔습니다.

 

 멜로디를 지을 때까지는 분명 포근한 기분이었는데, 가사를 끄적이다 보니 역시나 얼룩 같은 기분이 글에 남았습니다. 꿈에서 깨어나 두리번거리는 사람처럼 마음이 흔들거립니다. 어젯밤까지 관자놀이를 맴돌던 흔적이 노트 위에 자국을 남겼습니다. 게스트 하우스 마당에서 찾은 작은 평화가 못내 반가웠던 건, 목마름 뒤에 오는 해갈 같은 거였을까요.

 



( 전략 )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 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 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끈덕지게 따라붙는 과거와 현기증 같이 아른거리는 미래 사이에서 버둥거리더라도, 완벽히 평화로웠던 오후 한 철을 잊지 못할 겁니다. 가끔 찾아오는 이런 시간이 없다면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 짧은 명상의 순간을 ‘슬픔이 없는 십오 초’를 흉내 내어 ‘꿈꾸지 않는 십오 초’라고 이름 붙여 봅니다.


 번잡한 서울에서 지내다 보면 가만히 있어도 어쩐지 쫓기는 기분이 됩니다. 하고 싶은 일과 하지 못한 일, 마땅히 되어야 할 나의 모습 같은 게 아른 거려서 내가 나인지 내 일이 나인지 헷갈릴 때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행은 약간 반칙입니다. 어제의 내가 따라오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가는 셈이죠. 항상 잘 되는 건 아니지만요. 저의 경우 여행지에서 편한 시간을 보내고 괜찮은 노래도 건졌으니 좋은 여행이었습니다.


 저는 ‘날씨 때문에’라는 노래가 투명한 바람같이 가벼워서 좋아합니다. 지난밤의 눅눅한 꿈도, 슬픔도, 욕망도 모두 말라버릴 것 같은 좋은 날씨 속에서 그저 햇볕을 만끽하는 한 마리의 고양이가 되어… 라고 하면 좀 심한 과장이 되겠지만, 여하튼 밀도 높은 감정이라거나 강렬한 정서 같은 건 하나도 없는 그 무심함이 좋습니다. 오고 가는 바람과 내려오는 햇살, 새소리와 나무 데크의 냄새, 들꽃의 흔들림 같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필름 사진처럼 노래에 담겼습니다. 꿈꾸지 않은 십오 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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