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세계 동심원의 날
전기뱀장어 3집 앨범 [동심원] 발매를 기념하는 단독 공연이 벨로주 홍대에서 이틀간 열렸다. 이틀 차 공연은 전날 세팅해 둔 장비와 모니터 환경을 그대로 활용하기도 하고, 그래도 하루 공연 해본 셋리스트니 좀 더 편한 마음으로 공연에 임했다.
뮤지션들을 만나보면 의외로 공연 자체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큰 의의를 두지 않는 사람도 있더라. 하지만 난 공연하는 걸 좋아한다.
한동안 공연이 예전만큼 재밌지 않았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관객들이 많이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기간 동안 오는 사람도 꽤 적었고 마스크 끼고 환호나 떼창도 못하니 공연장 분위기가 뜨뜻미지근했었다.
이번 공연은 이제야 비로소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간 듯한 분위기라서 좋았다. 함께 실컷 웃고 부르고 몸을 움직였다.
요즘 운동을 꾸준히 했더니 체력이 부쩍 좋아진 느낌이다. 타고난 체력이 좋은 편이긴 하지만 두 시간 정도 공연을 하면 막판에는 약간 기진맥진하곤 했다. 이번 공연은 마지막 곡까지 집중력 있게 즐기면서도 약간의 여유가 남는 느낌이었다. 오래 즐겁게 활동하면서 멋진 공연을 하려면 역시 먼저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뮤지션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는 멘트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멘트는 여러 가지로 활용할 수 있는데, 공연 주제를 전달하기도 하고 곡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만들기도 한다. 노래를 자연스럽게 연결하거나 곡과 곡 사이의 단절감을 완화하기도 한다. 재미있게 얘기를 풀어나가면서 관객의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 수도 있고, 평소 잘 말하지 못하는 속내를 얘기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도 있다.
자랑이 되겠지만 나는 멘트를 재밌고 조리 있게 잘하는 편이다. 때론 곡 연주보다 멘트 잘한 게 뿌듯해 공연이 끝난 뒤 떠올리면서 웃기도 한다. 꼭 해야 하는 내용이 아니라면 멘트를 미리 준비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하는 편이다. 무대와 관객의 분위기에 맞춰서 유연하게 멘트를 하면 보다 자연스러운 멘트가 가능하다. 2회 이상 공연하는 경우에는 공연의 흐름이 같으니 동일한 멘트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비슷한 멘트를 반복하다보면 어쩐지 영혼 없이 느껴져서 좋아하지 않는다. 똑같은 농담을 두 번 하면 벌써 나부터 지루해지는 것처럼. 이번 공연도 첫날 공연 멘트를 좀 더 잘했다.
한국 인디가 얼마나 되었더라 25년? 30년?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라서 앞으로 저렇게 지내면 되겠다 싶은 롤모델이 딱히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도 앨범을 내고 무대에 서는 김창완이 있긴 한데, 인디라고 하긴 좀 그렇다.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무대에 서서 노래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러고 싶은데 어떻게 잘 될지 모르겠다. 막연히 두렵다기보다는 은근히 기대되기도 하고.
밴드를 시작하고 내가 가장 먼저 이름을 외우게 된 오랜 팬이 있다. 전뱀의 초창기 리디안이라는 클럽에서 주로 공연했는데, 그 시절 공연에 자주 찾아주었다. 나중에는 뜸해졌지만 늘 1호팬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 이번 단독 공연에는 정말 오랜만에 그 팬이 와서 사인도 받아갔는데, 반가워서 농담도 잘 나오지 않았다. 어디선가 잘 지내며 나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는 말이 기뻤다.
날씨가 추운 날 공연하게 되면 종종 떠오르는 일이 있다. 예전에 합정 메세나폴리스 야외무대에서 공연한 일이 있는데, 무척 추운 날이라서 코트도 벗지 못한 채 차가운 손을 녹여가며 공연해야 했다. 리허설을 마치고 공연장 주변을 맴돌고 있었는데, 어느 팬 분이 손을 녹이라며 따뜻한 캔음료가 담긴 봉지를 건네주었다. 그 마음이 따뜻했다.
학창 시절 밸런타인데이가 되면 괜스레 약간의 기대를 품고 책상 밑에 손을 넣어보았지만 뭐가 들어있던 적은 없었다. 특별히 인기 있던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인지 밴드를 하면서 받는 관심과 선물, 애정 어린 말이 아직도 좀 낯설다. 어린 시절 못 받은 초콜릿을 어른이 되어 잔뜩 받나 보다.
객원 멤버들과도 잘 지내고 있다. 무대 위에서도 무대 아래에서도. 다들 모난 구석 없이 좋은 성격에다 실력도 좋아서 합주도 공연도 즐겁다. 합주 때 잘 이끌어가지 못할까 봐 걱정도 좀 했는데, 필요한 부분은 적당히 의견 내주는 게 든든하다. 앞으로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호흡도 더 좋아질 것 같다.
학생 시절 동아리 활동을 제외한다면 처음 무대에 오른 건 2010년이다. 만 13년이 다 되어가는 긴 시간을 무대에 선 것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 다닐 수 있는 시간이니 참 길기도 하다. 무대에 오르던 초반에는 참 긴장도 되고 그랬다. 연주도 그렇지만 멘트 할 땐 더 떨려서 곡이 안 끝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스테이크, 너의 이빨, 자외선, 비밀, 구조지질학 이런 노래들을 무대에 올렸다. 곡 수가 모자라니 커버곡도 종종 했는데, 위저의 노래나 영화 ost인 That Thing You Do를 부르곤 했다.
라이브 클럽 빵에서 공연하게 된 일은 일종의 제대로 된 밴드라는 보증 같은 것이라서 기뻤다. 오디션 날에는 두 곡을 연주했는데, 다리부터 목소리까지 부들부들 떨렸던 기억이 난다. 떨어질 줄 알았는데, 공연하러 오라는 문자가 왔었다. 밴드팀의 경우 처음에 목요일에 공연하다가 인기가 있거나 클럽 사장이 선호하는 팀은 금요일이나 토요일로 옮겨가는 시스템인데, 우리 팀은 대부분 목요일에 공연했다.
2012년 최신유행 EP 발매 이후 밴드가 크게 관심을 받았고, 클럽 빵에서 준비한 단독 공연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왔다. 200명이 넘는 사람이 작은 클럽에 들어와 앞은 바닥에 앉고 뒤 편 사람들은 의자에 올라가서 공연을 관람했다. 인터미션에는 공연과 아무 상관없는 연극을 준비했었다. '송곳니 마을의 위기'라는 제목이었고, 멤버들이 연기하고 친구들을 불러 목소리 더빙을 부탁했다.
공연만 하는 것도 좋지만 재밌는 기획이 들어간 공연을 더 좋아한다. 준비하면서 귀찮아져서 살짝 후회할 때도 있긴 하다. 기억에 남는 공연 기획을 몇 가지 꼽아보자면, 우선 리더 쟁탈전. 전기뱀장어는 민주적인 팀이니까 리더도 투표를 통해 공정하게 선발해야 한다는 컨셉의 공연이었다. 사전 공연 홍보의 일환으로 네 명의 각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영상을 공개하기도 하고 정장을 갖춰 입고 어깨띠를 두른 채 선거유세를 하듯 사진을 찍기도 했다. 공연 날에는 멘트로 슬슬 선거 분위기를 낸 다음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각 멤버들의 장기 자랑 시간을 가졌다. 김나연은 동창 친구와 함께 박진영의 노래 <Honey>의 춤을 췄고, 김예슬은 단호박을 옆에 올려두고 김일두의 <괜찮은 사람>을 통기타를 연주하며 불렀다. 김민혁은 <풍향계>라는 핑거 스타일의 곡을 연주했던 것 같다. (아닌가 윤종신의 노래를 불렀나? 헷갈린다)
나는 랩을 했는데, 에미넴의 <Lose Yourself>비트를 깔고 그 위에 직접 쓴 가사로 랩을 했다. 캡모자와 선글라스로 꾸미고 무선마이크들 든 채 이리저리 무대를 휘젓고 다녔다. 동생과 동생 친구는 무대에 올라 스케치북을 넘기면서 전광판 역할을 해주었다. 이때 연습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가사가 아직도 다 기억이 난다.
마이 네이 이즈 인경 후보 넘버 투 세상은 요지경 벗 마이 드림스 컴 트루 국카스텐 만화경 몽니에는 이인경 다비치엔 강민경 전뱀에는 황인경 내가 어딜 가든 누구나 환영 가는 곳은 언제나 미정 사랑해요 모두들 안녕 내가 누구 바로 인경 누구나 인정하지 그게 나의 fashion 때론 두 개의 심장 그게 나의 passion 지누션 일루션 이것은 오버액션 날 따라 해요 그게 바로 너의 미션 ....... 너무 길어서 여기까지. 곡의 이름은 군계일학이다. 관객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내가 1등의 자리에 올랐지만 실제로 전뱀의 리더를 바꾸진 않았다.(리더는 쭉 김예슬이 맡았다.)
전뱀 노래자랑도 아주 재미있는 기획이었다. 공연 중간에 관객 참여 이벤트를 길게 넣었는데, 참가자가 자진해서 무대로 올라와 부르고 싶은 전뱀 노래를 멤버들의 연주에 맞춰 부른다는 기획이었다. 참가자가 혹시 너무 적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관객 참여율이 좋았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사람, 박자를 자꾸 놓쳐 큰 웃음을 주던 사람, 나 못지않게 잘 부르던 사람, 기타까지 치고 싶다고 한 사람 등 각양각색의 분들이 무대를 즐겁게 꾸며주었다.
물론 공연에 특별한 기획이 들어가면 평범한 공연에 비해 품이 많이 들어간다. 전곡은 아니어도 상당히 많든 곡들을 남자키, 여자키 두 가지 버전으로 연습해두어야 했다. 전국 노래자랑 시그널 송을 밴드 버전으로 편곡해서 연주했다. 실로폰도 준비해서 전국 노래자랑 풍으로 심사도 했다. 하여간 시키지도 않은 건 이렇게 열심히도 한다.
어떤 기획이든, 어떤 공연장이든, 관객이 몇 명이든, 사운드가 어떻든 모든 공연에는 각각의 재미가 있다. 익숙함과 새로움이 뒤섞이고, 공간을 울리는 공기에 맞춰 몸을 움직인다. 익숙한 노래라도 부를 때마다 새롭고 관객의 눈빛과 환호를 만나 유일한 순간을 만든다. 모두의 마음이 하나로 모인다. 공연장은 좋아하는 감정과 즐거운 기분이 가득한, 내가 언제든 돌아가고 싶은 여행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