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인경 Apr 30. 2022

track#1 늙은 개의 여행

라이너노트 Liner Notes


track#0 카세트테이프

(Now)track#1 늙은 개의 여행

track#2 하얀 방 안에서

track#3 까만 그림

track#4 혼자 듣는 노래

track#5 273

track#6 빅뱅이론

track#7 요란한 웃음과 시끄러운 낮의 열기

track#8 날씨 때문에

track#9 바람길

track#10 언제든 슬퍼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track#11 깨진 빛

track#12 타고난 길치



2017-2018년 발매한 12곡의 가사에 대한 이야기를 연작 형태로 적어보려고 합니다. 발매 당시 앨범 소개글에 기초한 글입니다. 한 싱어송라이터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어떤 가사를 썼는지 궁금하신가요? 첫 번째 트랙은 늙은 개의 여행입니다.




https://youtu.be/oKQtl6WWeqs


늙은 개의 여행


긴 여행을 떠나기 딱 좋은 날이야

가진 게 하나도 없으니 더는 잃을 것도 없네

제법 짧지 않던 내 삶에 만났던 사람들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 딱 좋은 날이야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채 처음으로 만났던 너

그땐 너도 많이 어렸어 나의 꼬마 친구야

우리 함께 뛰던 골목길 아직 그대로인데

나랑 나이 드는 게 달라서 너는 아직 어리구나

왠지 모를 기분에 인사도 건네지 못하고

다시 길을 나서네 두 번째 주인을 찾아


늙은 개가 길을 나서네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아마도 이건 나의 마지막 여행이 되겠지


두 번째 나의 주인은 큰 감나무 집 할머니

그 거칠었던 손이 그리워 나는 아직 꿈을 꾸네

재개발된 아파트 콘크리트 냄새

할머니의 냄새를 찾을 수 없었다네


세 번째 나의 주인을 찾아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몰라

차마 말로 하기 두려운 폭력과 허기와 외로움

나의 짧은 꼬리는 아직 기억하고 있네

초라한 너의 뒷모습 한참을 바라보다가

한바탕 욕을 퍼붓고 다시 뒤돌아섰네


긴 여행을 떠나기 딱 좋은 날이야

가진 게 하나도 없으니 더는 잃을 것도 없네

제법 짧지 않던 내 삶에 만났던 사람들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 딱 좋은 날이야


늙은 개가 길을 나서네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아마도 이건 나의 마지막 여행이 되겠지




1. 여행


 개는 늙었지만 자유롭습니다. 견생(犬生)의 끝에 선 어느 날 주인 없는 늙은 개는 여행을 떠납니다. 더는 보살핌 받을 필요도 지켜야 할 무언가도 없는 자유의 몸이기에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거쳐간 세 명의 주인을 만나볼 생각입니다. 곧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실감하며 어린 시절 뛰어놀던 동네 쪽으로 한걸음 내딛습니다.


 늙은 개는 왜 길을 떠나게 되었을까요. 지난 시간 함께했던 주인들을 마주하며 자신의 한평생을 돌아보고 싶은 걸까요. 세 명의 주인을 잘 찾을 수 있을까요. 만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걸까요. 집을 나섰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까지가 여행이라면, 개가 결국 돌아가는 곳은 어디인가요.


2. 견생

 내가 아주 작았을 때, 우리 가족은 광주 어딘가의 골목에서 세 들어 살고 있었습니다. 마당에는 주인집에서 키우는 개가 있었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갈색의 튼튼하게 생긴 개였는데, 내 어린 눈에 엄청나게 커보였습니다. 나는 늘 '개가 어떻게 소 같이 클 수가 있지'라고 생각하며 마당의 가장자리로 옆걸음을 걸었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방과 후에는 늘 외갓집에 갔습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했기 때문에 할머니가 나를 먹이고 입혔습니다. 큰 감나무가 드리워진 할머니 집 마당에는 늘 계절이 오고 갔고 새도 바람도 쉬 드나들었습니다. 할머니 손등을 쪼았던 닭이 있기도 했고, 여느 집이었다면 집안에서 사료를 먹으며 곱게 자랐을 것 같은 말티즈 종의 강아지 뽀삐도 같이 살았습니다. 뽀삐는 사람이 남긴 음식을 먹고 밖에서 자면서 험하게 살았습니다. 때가 타 거뭇해진 뽀삐를 보며 밖에서 자면 춥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어렸던 나는 발언권이 딱히 없었습니다.


 마당은 어린 나에게 충분히 넓고 흥미진진한 놀이터였습니다. 사루비아 꽃을 따먹고 개미도 구경하고 마당 건너편 눅눅한 광에 들어가 톱이나 삽 같은 것도 구경했습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기와지붕 위에 눕기도 하고, 감나무 굵은 가지를 타고 앉아 참새를 관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가끔 마당은 잔인한 살육의 현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외갓집에 얹혀살던 외삼춘은 가끔 어디선가 죽은 개를 가져와 토치로 털을 그을렸습니다. 조금 궁금하지만 많이 무서웠기 때문에 고개를 돌렸지만 동물을 태우는 강한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오는 건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3. 개가 되는 밤


 늦은 밤 가만가만 기타를 치며 조용조용 만든 노래는 왜 그리도 눅눅한지요. 고작 벽 하나 차이로 혼자인 건데 방문을 닫으면 왜 그리 쓸쓸한가요. 이렇게 늦은 시간 개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나같이 달도 보고 별도 보고 그럴까요. 불현듯 생각난 듯 개들이 동시에 짖기 시작합니다. 개가 짖는 걸 마칠 때까지 밤은 끝나지 않습니다. 개도 나도 깨어있지만 내가 개가 되고 개가 내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가끔 나는 개가 되었습니다. 눅눅한 막차에서, 창문이 까만 방 안에서, 안개를 퍼뜨리는 푸른 가로등 옆에서.




라이너노트 Liner Notes


track#0 카세트테이프

(Now)track#1 늙은 개의 여행

track#2 하얀 방 안에서

track#3 까만 그림

track#4 혼자 듣는 노래

track#5 273

track#6 빅뱅이론

track#7 요란한 웃음과 시끄러운 낮의 열기

track#8 날씨 때문에

track#9 바람길

track#10 언제든 슬퍼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track#11 깨진 빛

track#12 타고난 길치

매거진의 이전글 track#0 나의 마이마이 카세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