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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인경 May 02. 2022

track#2 하얀 방 안에서

라이너노트 Liner Notes


track#0 카세트테이프

track#1 늙은 개의 여행

(Now)track#2 하얀 방 안에서

track#3 까만 그림

track#4 혼자 듣는 노래

track#5 273

track#6 빅뱅이론

track#7 요란한 웃음과 시끄러운 낮의 열기

track#8 날씨 때문에

track#9 바람길

track#10 언제든 슬퍼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track#11 깨진 빛

track#12 타고난 길치





2017-2018년 발매한 12곡의 가사에 대한 이야기를 연작 형태로 적어보려고 합니다. 발매 당시 앨범 소개글에 기초한 글입니다. 한 싱어송라이터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어떤 가사를 썼는지 궁금하신가요? 두 번째 트랙은 <하얀 방 안에서>입니다.






https://youtu.be/oXYfxHYkfDU



하얀 방 안에서


오 나의 팔이 충분히 길어서

깊은 거기 있는 널 꺼냈다면 어땠을까

향기 없는 꽃은 나는 싫은 걸

다신 볼 수 없는 너의 얼굴이


나의 게으름과 어리석음과

빌어먹을 이기심 때문에

널 놓쳤다고 이제와 고백한대도 무슨 소용이 있나


활짝 웃던 날도 많았을 텐데

흐린 날에만 널 볼 수 있단 게 이상하지


예쁜 너의 눈이 울고 있는데

잠든 나의 몸을 가눌 수 없네


나의 게으름과 어리석음과

빌어먹을 이기심 때문에

널 놓쳤다고 이제와 고백한대도 무슨 소용이 있나

널 놓쳤다고 이제와 고백한대도 무슨 소용이 있나






1. 고무고무 열매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원피스>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해적왕이 꿈인 루피가 동료들을 모아 전설의 섬을 찾아 모험을 떠난다는 이야기입니다. 특유의 근성과 동료애 말고도 루피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데, 자기 몸을 자유자재로 늘릴 수 있는 능력입니다. 루피는 이 능력을 이용해서 동료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거나 바다에 빠질 위험에 처했을 때 팔을 길게 뻗어 구해냅니다. 스스로 처한 위험에서도 벗어나고요. <원피스>의 그 뭉클한 장면을 보다가 문득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은 배와 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


2. 광장


 바다에 처박혀 기울어진 선체가 티비에 처음 나왔을 때는 대부분 사고라고 생각했지만, 뱃머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변변한 구조 소식이 들려오지 않자 사람들은 이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수학여행 일정 중이었던 단원고 학생들이 승객의 다수였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 더했습니다. 승선했던 단원고 학생 중 구조된 인원은 고작 23퍼센트에 불과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분노했고,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연이어 시위가 열리고 광화문 광장에는 농성 천막이 설치되었습니다. 뉴스에서는 다각도로 사건을 분석했고 관련된 다큐멘터리와 영화가 방영되었습니다. 시민들은 책임자를 밝혀내 단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모았습니다. 한편, 누군가는 교통사고에 비유하며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고 알리바이를 만들어내느라 분주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광장은 이렇게 온갖 사람의 목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3. 방 안


 하지만 방 안은 고요했습니다. 아이를 잃은 부모가 잠을 청할 때, 형제자매를 잃은 형제자매가 밥을 먹을 때, 친구를 잃은 친구가 빈 책상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 침묵은 늘 따라다니며 좁고 텅 빈 방을 지었습니다. 소리 내 말하지 못한 온갖 생각들이 하얀 벽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습니다.


 광장에서는 책임자를 엄벌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가도 방 안으로 돌아오면 자기 자신이 미웠습니다. 어떤 우연이든 자신이 관여해서 무언가를 바꿀 수 있지 않았을까 끝없이 생각했습니다. 이날 저녁에는? 그날 아침에는? <원피스>의 루피 같이 손을 길게 뻗어 구할 수 있었다면? 그 생각들은 논리정연하지도 않고 순서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온통 소란한 침묵으로 방은 차올라 발목까지 허리까지 목까지 잠겼습니다.


4. 고백


 그들의 숨도 쉬기 힘든 고통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누군가 또 그 소리 없고 좁은 방에 갇혀 우는 일이 없었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바라기만 하면 부족하다고 생각이 들어서 노래에 담아 고백했습니다. 게으름, 어리석음, 이기심.


 얼마 전 세월호 8주기가 지났습니다. 나는 더 부지런하고 영리하고 착하게 살아왔나 생각하면 부끄러운 마음이 됩니다. 누군가를 혹은 뭔가를 죽이지 않고 살고 있나 반성합니다. 더 많은 것들을 안을 수 있는 길고 넓은 팔을 갖기 위해 노력했나 돌아봅니다.






라이너노트 Liner Notes


track#0 카세트테이프

track#1 늙은 개의 여행

(Now)track#2 하얀 방 안에서

track#3 까만 그림

track#4 혼자 듣는 노래

track#5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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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7 요란한 웃음과 시끄러운 낮의 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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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9 바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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