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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인경 May 09. 2022

track#3 숨은 무지개

[라이너노트] 까만 그림

라이너노트 Liner Notes


track#0 카세트테이프

track#1 늙은 개의 여행

track#2 하얀 방 안에서

(Now)track#3 까만 그림

track#4 혼자 듣는 노래

track#5 273

track#6 빅뱅이론

track#7 요란한 웃음과 시끄러운 낮의 열기

track#8 날씨 때문에

track#9 바람길

track#10 언제든 슬퍼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track#11 깨진 빛

track#12 타고난 길치






2017-2018년 발매한 12곡의 가사에 대한 이야기를 연작 형태로 적어보려고 합니다. 발매 당시 앨범 소개글에 기초한 글입니다. 한 싱어송라이터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어떤 가사를 썼는지 궁금하신가요? 세 번째 트랙은 <까만 그림>입니다.






https://youtube.com/playlist?list=OLAK5uy_k_v5Wad5hUHy-RyLRB5zat6fhLWPUhlMo



까만 그림


네가 그려놓은 그림은

온통 까만색이 많네요

검게 칠한 끝없는 배경엔

까만 그림만 있네요


나는 알아볼 수 있었어요

나는 알아볼 수 있었어요

나는 알아챌 수 있었어요

나는 알아챌 수 있었어요


검게 그린 끝없는 하늘엔

까만 새들이 나네요


나는 알아볼 수 있었어요

나는 알아볼 수 있었어요

나는 알아챌 수 있었어요

나는 알아챌 수 있었어요

있었어요

있었어요

있었어요






1. 스크래치 놀이


 교사인 동생 덕분에 방과 후 초등학교 교실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미니 인간 사이즈의 책상과 걸상을 보니 괜스레 마음이 애틋해지더군요. 내 어린 시절과 달라진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은 비슷했습니다. 미화부장이 중심이 되어 꾸미던 환경판과 반 아이들의 그림이 나란히 걸려있는 교실 뒤편의 풍경 또한 그대로였습니다. 동생을 기다리며 천천히 그림을 구경했습니다. 초등학생 작가들의 작품 중 하나가 유난히 눈에 띄었는데, 스크래치로 작업한 그림이었습니다.


 저는 미술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아이였지만, 스크래치 놀이는 참 재밌고 신기해서 좋아했습니다. '스크래치'라 하면 뭔가 싶으시겠지만, 아마 많이들 해보셨을 겁니다. 먼저, 도화지를 여러 색깔의 크레파스로 칠한 후 검은 크레파스로 덮어버립니다. 기껏 형형색색 칠해놓고 까맣게 덮어버린다고? 어렸던 제 마음에 허무라는 단어가 깊게 배었습니다. 하지만 스크래치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마지막 반전에 있습니다. 이쑤시개나 못 같이 뾰족한 물체로 검은 표면을 긁어내며 그림을 그려나가면 갑자기 알록달록한 선이 나타납니다. 머릿속에서 팡팡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둠이 침식한 듯 으스스하고 갑갑했던 도화지에 갑작스레 나타난 무지개 같이 영롱한 선과 도형들은 마법 같이 춤을 추었습니다. 마치 검은 장막 뒤에 이미 예쁜 그림이 존재하고 있고, 능숙한 마술사인 내가 휘리릭 장막을 벗겨내 그림을 드러낸 것만 같았습니다.


2.  Hello darkness my old friend


 어둠이 대지에 입 맞추면 온 세상이 공평히 검은색에 잠기는 게 나는 좋았습니다. 아늑한 밤의 품에 안겨 낮에 속하는 사람과 사물 모두가 어렴풋한 윤곽만 남긴 채 녹아버리길 바랐습니다. 밤은 고독했으나 내게 품이 맞는 옷 같았습니다. 우주를 떠도는 운석처럼, 바다 밑을 헤엄치는 심해어처럼. 나의 밤은 검은 하늘이었고 때때로 검은 깃을 가진 새가 궤적을 그렸지만 스크래치 놀이 때와 같이 알록달록한 색깔들이 폭죽 같이 터지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왜소한 나의 자아는 검은 장막 뒤를 들추었을 때 예쁜 그림이 없다는 걸 들키게 될까 봐 더욱 깊이깊이 밤의 품으로 파고들었습니다.


 황현산에게 그랬듯 나에게도 밤은 선생이었습니다.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낮에 속한 사람과 사물을 점검하고, 부유하는 생각들을 엮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밤이 되면 어떤 것들은 떠오르고 하고 어떤 건 그대로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떠오른 것들을 뜰채로 건저 노래를 만들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하고, 그저 입 안에 넣고 우물거려보기도 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아침형 인간을 권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가 '배신'일 정도였다고 하면 내 오랜 친구이자 선생인 밤에 대한 저의 애착을 알 수 있으시겠죠.


3. 슈뢰딩거의 고양이


 하지만 드리운 검은 장막 뒤에 스크래치 놀이의 그것 같은 무지개가 흐르고 있지 않는다고 누가 말했나요. 왜 나는 그저 그렇게만 믿고 있었을까요. 솔직히 나는 감히 밤을 배신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검은 새틴 같은 밤의 매혹을 뿌리치고 검정 크레파스를 긁어낼 용기가 나에게는 없었습니다. 빈틈없이 검은색으로 덮어버리면 나의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타인은 물론이고 스스로 알아채기도 전에 나는 내 마음속 풍경에 검은색을 칠해버린 셈입니다. 나는 스스로를 유예시켜 버렸습니다.


 구원은 스스로 구하는 거라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은근한 마음이야 있겠지요. 나는 바랐습니다. 밤의 검은 장막이 찢어지고 갈라진 그 틈새로 무지개가 새어 나오기를. 못난 도망자가 행운을 얻어 텁텁한 검정 크레파스를 긁어내는 순간이 있길. 나의 스크래치 놀이 맨 마지막에 화려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길. 웅얼거리는 목소리더라도 진실을 말하고 비로소 나의 유예가 끝나기를.






라이너노트 Liner Notes


track#0 카세트테이프

track#1 늙은 개의 여행

track#2 하얀 방 안에서

(Now)track#3 까만 그림

track#4 혼자 듣는 노래

track#5 273

track#6 빅뱅이론

track#7 요란한 웃음과 시끄러운 낮의 열기

track#8 날씨 때문에

track#9 바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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