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너노트 Liner Notes
track#0 카세트테이프
track#1 늙은 개의 여행
track#2 하얀 방 안에서
track#3 까만 그림
(Now)track#4 혼자 듣는 노래
track#5 273
track#6 빅뱅이론
track#7 요란한 웃음과 시끄러운 낮의 열기
track#8 날씨 때문에
track#9 바람길
track#10 언제든 슬퍼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track#11 깨진 빛
track#12 타고난 길치
2017-2018년 발매한 12곡의 가사에 대한 이야기를 연작 형태로 적어보려고 합니다. 발매 당시 앨범 소개글에 기초한 글입니다. 네 번째 트랙은 <혼자 듣는 노래>입니다.
혼자 듣는 노래
혼자여서 외로운 게 아냐
외로워서 혼자인 그런 밤 넌 이해하겠지
넋두리를 하고픈 게 아냐
관심받고 싶은 것도 아냐 넌 그런 게 아냐
이 노래를 듣고 있는 이 시간
고작 3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순간이더라도
너는 내 곁에 있는 거라서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그렇게 난 믿기로 했어
이 노래를 듣고 있는 이 시간
너를 볼 순 없지만
널 아끼는 내 맘이
여기 네 곁에 있는 거라서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그렇게 날 넌 믿어보겠니
1. 그 안에 내가 있었겠니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늦은 밤 홀로 앉은 이의 뒷모습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실상 물리적으로 혼자인 상태가 꼭 외로움으로 연결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혼자라도 잘 차려먹고, 운동도 하고, 코인 노래방도 가면서 씩씩하게 잘 지낼 수 있지요. 반대로 타인과 함께지만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도 많습니다. 가족과 함께 살더라도 제대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더 답답할 뿐이고, 일터에서 많은 동료에게 둘러싸여 있더라도 마음 터놓고 지낼 사람이 없다면 역시 고독하다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럴 땐 차라리 혼자가 낫습니다. 타인과 함께라서 오히려 더 외로울 때도 많거든요. 그런 걸 거창하게는 ‘군중 속의 고독’이라 부르나 봅니다.
순수함을 외친 적 없어
사랑이란 말이 다 뭐야
하루하루 살았을 뿐 그 안에 내가 있었겠니
…
다 사라지기를 바랐어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널 만나고 뒤늦은 내 후회는 돌이킬 수 없니
델리스파이스의 노래 <Y.A.T.C>에는 인간 틈바구니에서 부대끼는 일이 얼마나 사람을 질리게 하는 일인지 쓰여 있습니다. 숱한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르더라도 진짜 내 모습을 보는 사람이 없다면 ‘그 안에 내가 있’지 않은 텅 빈 하루하루를 보내게 될 뿐이겠지요.
2. 혼자라도 웃으며 말하고
MBTI 성격 유형 검사를 해보니 저는 ISFP 유형의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화합을 추구하지만 개인주의적이고 섬세하지만 회피적인 면도 있는 그런 유형이라는데, 아무래도 제 얘기가 맞는 것 같습니다. 저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잘 관찰하는 편이라 분위기의 미묘한 변화를 잘 캐치하지만, 말이 느리고 자신감이 부족해서 대개는 흘려보내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보니 타인과 함께일 때 에너지 소모량이 쓸데없이 많아서 집에 가는 길에는 나도 모를 한숨을 내쉴 때가 많습니다. 과연 내가 사람을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다 싫고 혼자 있고 싶은 걸까. 혼자라서 외로운 줄 알았는데 사람을 만나도 여전히 외로운 건 왜일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지곤 했습니다. 대체 뭘까요. 혼자와 함께. 외로움과 충만함.
홀로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종종 흥얼거리던 노래를 오랜만에 다시 들어봅니다. 에픽하이의 노래 <혼자라도>입니다.
둘이서 걷던 거리가 나눠진 후에도
혼자서 걷는 이 거리가 외롭지는 않죠
비록 혼자라도
…
혼자라도 웃으며 말하고 아무도 모르게 오늘도
혼자라도 웃으며 말하고 아무도 모르게 오늘도
둘이 걷다가 혼자가 되었다면 외로울 것 같은데 왜 괜찮다고 하는 걸까요? 예전부터 이 가사가 잘 이해 가지 않았습니다. 저의 오랜 궁금증은 외로움에 대한 저의 최근 연구 결과 드디어 답을 찾았습니다. ‘혼자라도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지금은 비록 혼자 걷지만 길이 나눠지기 전까지 둘이 걸었던 기억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는 기억, 감정이 있기 때문에 혼자라도 외롭지 않게 걸을 수 있습니다. 노래에서 에픽하이 세 명의 멤버(타블로, 미쓰라, 투컷)는 각자의 ‘외로움’을 이야기합니다. 외로움에 관해 함께 나눈 대화 때문에라도 에픽하이의 멤버들은 서로의 버팀목이 되고, 비로소 외롭지 않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건, 에픽하이 멤버들 뿐 아니라 나도 이 노래를 들으며 외로움을 잊었다는 겁니다. 쓸쓸한 귀갓길에 이 노래를 들으면 기분이 경쾌해지고 마치 도시의 여행자가 된 양 힘 있게 걷곤 했습니다. 나는 혼자였으나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에픽하이랑 같이 걸었으니까요.
3. 소환술
노래라는 게 참 신기합니다. 부르고 연주한 사람이 한참 전에 남긴 목소리와 연주가 지금 내게는 생방송으로 펼쳐집니다. 심지어는 이미 세상을 떠난 에이미 와인하우스와 드라이브를 할 수도 있고, 존 레넌과 산책을 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음악가가 타임머신을 타고 나의 시간대로 여행을 오는 것 같기도 하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언제든 뿅 나타나는 게 마치 내가 그를 소환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바이올린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하는 도우너같이, 누군가 동그란 음반 모양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하는 상상을 방금 해보았습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소환해서 한바탕 즐기고 나면 내적 친밀감이 샘솟고 길에서 마주치면 인사라도 하고픈 마음이 됩니다. 그런데 만약 내 노래를 듣는 누군가가 이런 기분을 느낀다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제 마음은 더없이 충만하고 놀랍고 심지어 살짝 어지럽기까지 합니다.(소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노래라는 매체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투과하여 감정이 연결되는 일은 무척 마법 같습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것만 같지요. 이렇게 시공간을 초월해 친구가 된 이들은 외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 지금 소개하고 있는 이 노래 <혼자 듣는 노래>는 제 마음이 가장 외로울 때 만들었던 노래입니다. 자기 이야기도 잘 안 하고, 자기애도 부족한 사람이 어느 밤 본인의 감정에 솔직하게 대면하고 싶어서 가사를 써내려 갔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나중에 이 노래를 듣게 될 사람 X가 떠올랐습니다. 제 상상 속 인물인 X는 어느 밤 저의 노래를 들었고, 이 밤에 외로운 게 나 혼자만은 아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X와 연결되었다는 기분은 또한 저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노래를 통해 외로움을 나눌 수 있다면, 그래서 외롭지 않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또 있을까요. 그래서 앞으로도 듣고 부르려고 합니다. 사람으로 비롯된 외로움의 치료법 또한 사람이기 때문에 제 노래는 앞으로도 사람을 향할 예정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소환 부탁드립니다.
라이너노트 Liner Notes
track#0 카세트테이프
track#1 늙은 개의 여행
track#2 하얀 방 안에서
track#3 까만 그림
(Now)track#4 혼자 듣는 노래
track#5 273
track#6 빅뱅이론
track#7 요란한 웃음과 시끄러운 낮의 열기
track#8 날씨 때문에
track#9 바람길
track#10 언제든 슬퍼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track#11 깨진 빛
track#12 타고난 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