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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인경 May 22. 2022

track#5 273

라이너노트 Liner Notes


track#0 카세트테이프

track#1 늙은 개의 여행

track#2 하얀 방 안에서

track#3 까만 그림

track#4 혼자 듣는 노래

(Now)track#5 273

track#6 빅뱅이론

track#7 요란한 웃음과 시끄러운 낮의 열기

track#8 날씨 때문에

track#9 바람길

track#10 언제든 슬퍼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track#11 깨진 빛

track#12 타고난 길치






2017-2018년 발매한 12곡의 가사에 대한 이야기를 연작 형태로 적어보려고 합니다. 발매 당시 앨범 소개글에 기초한 글입니다.





https://youtu.be/46g1nALpq4E


273


버스 안에 밤이 내리면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마저

창 밖을 보기 바빠서

창 밖을 보기 바빠서


말이 없는 기사님은

종점까지 가겠지만

할 말이 남은 사람들

각자의 정류장에서


웃는 얼굴로 우는 눈빛으로

한참을 바라보다가

곧 집으로 돌아가네


버스 안에 밤이 내리면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

사람들 각자의 길로

각자의 정류장에서


한참을 바라보다가

곧 집으로 돌아가네






1. 서울 버스의 대명사

 

 273은 서울을 횡단하는 시내버스 노선입니다.(이백칠십삼이 아니라 이칠삼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대학생의 스쿨버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죠. 제가 다녔던 대학도 273이 지나기 때문에 친구를 만날 때, 데이트가 있을 때, 영화를 보러 갈 때 자주 탑승했습니다. 스무 살 즈음 상경한 후 가장 많이 탔던 버스라서 273이야말로 서울 버스의 대명사라는 혼자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학생의 스쿨버스답게 273은 홍대 앞도 지나갑니다. 제가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 2010년부터는 홍대 라이브클럽과 합주실에 출근하다시피 자주 다녔기 때문에 스쿨버스였던 273이 이번에는 출근버스가 되어주었습니다. 기타와 페달 가방을 주렁주렁 매단 채 버스를 타고 합주실로 클럽으로 공연장으로 부지런히 다녔습니다. 리디안, 빵, FF, 상상마당, 롤링홀, 브이홀 등등. 지금이야 집도 이사했고, 승용차도 있어서 거의 탈 일이 없지만 당시에는 공연을 마치면 퇴근버스 273에 올라 집으로 향했습니다. 기타를 무릎 앞에 놓고 창 쪽으로 기대앉아 아직 남은 공연의 열기를 식히곤 했습니다.

 

2. 하차벨만 누르면 돼

 

 누구라도 일터는 피곤한 법입니다. 클럽에서 공연하는 밴드 뮤지션도 예외일 순 없습니다. 공연을 잘 해내려면 열심히 해야 합니다. 다른 멤버의 소리를 잘 들으며 호흡을 맞춰야 하고, 장비와 악기에 문제가 없는지 신경을 써야 하고, 연주와 가창에 실수가 없도록 집중해야 합니다.(매번 잘 되진 않지만요.) 더 나아가서는 관객과 잘 공감하고 음악의 영감을 잘 전달할 수 있도록 몰입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동시에 해내야 합니다. 기타를 메고 내내 서있는 것만으로도 피곤한 일인데 말이죠.


 그래서 집으로 향하는 퇴근길은 몸도 마음도 지쳐 있습니다. 택시나 자가용에 악기를 탁 넣고 편하게 가면 좋으련만 유복하지 않고 어린 청년이니 일단은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걷습니다. 기타와 페달 가방과 오늘의 후회를 주렁주렁 매달고 퇴근버스에 오릅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작게 한숨을 내쉬고 나면 그래도 조금 편한 기분이 됩니다. 이제부터는 열심히 해야 하는 일이 없습니다. 일단 버스에 올라탄 이상 목적지까지 열심히 가는 방법은 없습니다. 제 때 하차벨만 잘 누르면 되지요.(사실 이마저도 제대로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다른 승객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쓸 필요도 없습니다. 무대에서는 관객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갖지만 버스 안에서 나는 잠시 뒤면 헤어질 낯선 무리 중 한 명일 뿐입니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닌지 버스 안의 사람들은 대부분 무표정입니다. 어쩌면 하루 내내 표정을 지어내야 했을 사람들이 이제는 긴장을 풀고 버스에 앉았습니다. 그들의 무표정은 나름대로 편해 보입니다.

 

3. 흰 바람벽이 있어

 

 종점이 가까울수록 승객은 줄어들고, 창밖에는 부드럽게 어둠이 깔립니다. 버스의 창은 창문이면서 스크린이기도 했습니다. 요란한 네온사인을 비추기도 하고, 비를 받아내는 가로등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노인의 뒷모습도, 잠이 든 주정뱅이도 보였습니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스스로의 얼굴이 창에 비추기도 했습니다. 백석이 흰 바람벽에서 보았을 얼굴과 얼굴들이 두서없이 나타났다 사라졌습니다.


 온갖 풍경이 지나는 버스에 앉아 있노라면 종종 회전목마에 올라 탄 듯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낯선 풍경들 속에서 엄마아빠는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버스에 타 창밖을 바라보면 버스가 사라지듯 회전목마에 앉으면 회전목마는 보이지 않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상이 나타납니다. 가깝지만 손에 닿지 않은 세상이고 자세히 보려 하면 이미 지나간 기억이 되는 세상입니다. 언젠가는 내려야 하지만 음악이 멈추고 내리기 전까지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버스나 회전목마는 정류장에 도착하거나 음악이 끝나기 전까지 고립계입니다. 버스 좌석이나 목마에 앉아있을 때 바깥세상이 유독 현실감 없는 영화 같이 느껴지는 건 그 탓일지도 모릅니다.

4. 인생의 회전목마


 인생을 원경으로 바라보면 왜 눈물이 날 것 같은지요. 스스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건 역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일까요. 내가 주인공인 다큐멘터리 속의 나는 세상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추기 위해 어설픈 스텝을 밟고 있습니다. 모자라게 태어나 나름대로 애써온 모양이 가엽습니다. 저 앞 좌석에 탄 사람도, 운전석에 앉은 기사도 한 명 분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은 소름 끼치게 놀랍습니다. 저마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영화 속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겠죠? 나 한 명의 인생도 머릿속에 담기 힘든데 하물며 이 별처럼 많은 소우주를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버스에서 잠깐 만났다가 각자의 정류장으로 흩어집니다.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왈츠풍의 곡 '인생의 회전목마'를 꺼내 듣습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테마 음악인 이 곡을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버스 창가에 앉아 차가운 창문에 한쪽 이마를 기댄 채 듣는 겁니다. 공교롭게도 저의 노래 ‘273’ 역시 왈츠풍입니다. 버스에 탄 누군가가 밤의 창에 이마를 기댄 채 제 노래를 듣는 풍경을 상상해봅니다.






라이너노트 Liner Notes


track#0 카세트테이프

track#1 늙은 개의 여행

track#2 하얀 방 안에서

track#3 까만 그림

track#4 혼자 듣는 노래

(Now)track#5 273

track#6 빅뱅이론

track#7 요란한 웃음과 시끄러운 낮의 열기

track#8 날씨 때문에

track#9 바람길

track#10 언제든 슬퍼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track#11 깨진 빛

track#12 타고난 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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