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좀처럼 갈 일이 없는 종로 쪽에서 약속이 하나 잡혔다. 일정을 마치고 종로 쪽으로 넘어가니 시간이 꽤 남았다. 어떻게 시간을 때울까 고민하다가, 동묘 구제시장에 가서 옷을 사기로 했다. 언젠가 한 번 도전해보고 싶었는데 이번이 좋은 기회다 싶었다. 처음에는 좀 젊은 분이 가게를 보고 있는 그럭저럭 번듯한 가게에서 이만 원을 주고 나이키 티셔츠를 샀다. 나오는 길엔 노상에서 판매하는 아주머니가 장사하는 가게에 들렀는데, 걸려있는 건 팔천 원, 바닥에 쌓여있는 건 천 원이라고 했다. 팔천 원 두 벌과 천 원 두 벌을 샀다. 팔천 원은 천 원이 8개, 이만 원은 천 원이 20개다. 내가 쓴 돈을 다 합하면 (천 원 할인받아서) 3만 7천 원이다. 서른일곱 벌의 천 원짜리 옷을 사서 돌아가는 상상을 잠깐 해보았다.
밤에 집에서 가볍게 술을 마신다면 데킬라나 보드카를 한두 잔 마시는 걸 선호한다. 가끔 맥주도 좋지만 많은 양을 마셔야 하니까 좀 부담스럽다. 위스키는 내 기준에 좀 느끼해서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집 근처에 주류전문점이 하나 생겼다. 술에 조예가 깊은 건 아니기 때문에 데킬라를 구매하는 경우 대부분 호세 꾸엘보를 구매하곤 하는데, 이 가게에는 호세 꾸엘보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 듀랑고라는 이름의 데킬라를 데리고 왔는데, 집에 와서 마셔보니 꽤나 마음에 들었다. 호세 꾸엘보에 비하면 덜 달고, 좀 더 싸하고 향이 강한 느낌이다. 한 번도 여행한 적은 없지만 멕시코 문화권에 늘 매력을 느껴왔는데, 우연인지 아닌지 술도 데킬라를 좋아한다. 어쩌면 난 전생에 한 명의 마리아치였을지도.
오늘은 마트에서 쌀을 사 왔다. 평소에 밥을 지을 때 잡곡을 좀 섞는 편이긴 한데, 요 며칠은 극단적으로 현미 95, 잡곡 5의 비율로 먹어보았다. 얼마 전에 집에 백미가 다 떨어진 김에 ‘아주 건강하게 현미로만 밥을 지어먹겠어’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백미 대신 현미를 구매해 본 것이다. 근데 갑작스러워서인지 배가 좀 불편하고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현미는 소화가 잘 되지 않기 때문에 오래 불려서 밥을 짓고, 먹을 때도 잘 씹어 먹어야 한다고 쓰여있었다. 뭣도 모르고 현미밥을 잔뜩 지어버렸는데, 아까워서 버리긴 좀 그랬다. 고민하다가 리조또 비슷하게 만들어서 한동안 질리도록 먹었다. 하여간 나는 매사에 깊이 생각 않고 행동하는 바보다. 이번에 새로 산 쌀은 백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