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녜스 바르다의 영화에 붙는 형용사들
* 아래 글은 디지털 문학 플랫폼 던전에 2021년 4월 5일에 처음으로 공개되었습니다.
https://www.d5nz5n.com/work/82/episode/1262
아녜스 바르다를 처음 알게 된 것이 언제였는지 떠올려보자. 가물가물하지만 콕 집어서 말할 수 있는 시기는 2018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7)을 한국에서는 여성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상영하는 것이어서 포스터가 크게 걸려있던 것을 기억하는데, 제목도 포스터도 섹시하지 않아서 정말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할머니가 주인공인 다큐멘터리?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바르다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니 매우 유감이다. 왜냐하면 바르다의 작품의 대다수가 섹시한 편에 속하기 때문이다. 장난기 넘치고, 위험하고, 솔직하다. 또 아쉬운 점은 이 모든 장점이 대부분 불어로 된 제목이나 대사의 말장난에서 발견되는데, 한국말로 제대로 번역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의 불어 원제는 <Visages Villages>로, <얼굴들 마을들>이라는 뜻이며 불어로 읽으면 라임이 맞는다. 그나마 영어가 불어와 비슷하다 보니 영어 제목인 <Faces Places>은 의미를 살리면서 라임도 맞는데,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의미는 물론 라임도 맞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촌스럽다. 차라리 <얼굴들 마을들>이라고 직역하는 것이 훨씬 낫다. 이런 식의 말장난은 <벽 벽들 Mur Murs>(1980), <방랑자 Sans Toit Ni Loi (직역: 지붕도 법도 없이)>(1985) 등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Mur Murs>의 경우 로스앤젤리스의 거리 벽화를 담은 다큐멘터리로, 직역하면 ‘벽 벽들’이 맞겠지만 빠르게 읽으면 불어로 ‘속삭임’ 혹은 ‘중얼거림’이라는 뜻인 ‘murmure’와 발음이 같다. 따로 있으면 다른 의미를 갖던 것들이 병치되면서 의미가 달라지는 순간이다. 영화라는 매체의 가장 큰 잠재력 중 하나인 몽타주의 효과를 제목에서부터 드러내는 것이다.
이 모든 말장난을 제대로 전달하고 모두가 잘 이해하면 좋겠지만 외국어 번역이라는 게 늘 한계가 있는 법이다. 또 매체 특성상 언어 전달이 완벽하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것이 영화다. 바르다 영화의 시적 특징은 제목이나 대사뿐만 아니라 장면이나 캐릭터 연출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바르다의 가장 시적인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Les glaneurs et la glaneuse (직역: 이삭 줍는 이들과 이삭 줍는 여자)>(2000)를 예로 들어보자. 바르다는 밀레의 작품 <이삭 줍는 여인들>을 비롯한 이삭 줍는 이들을 담은 근대 회화 작품으로부터 시작하여 동시대 이삭 줍는 행위를 떠올린다. 현대의 이삭 줍는 사람들은 쓰레기통을 뒤지는 이들, 마트에 내다 팔지 못하는 못생긴 감자를 줍는 이들, 새벽시장이 파한 뒤 찌꺼기 채소와 과일을 줍는 이들, 슈퍼마트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을 버리기를 기다리는 이들이다. 바르다는 감자 수확이 끝난 뒤 남은 것을 모아 담는 이들을 인터뷰하다가 하트 모양 감자를 발견한다. 그녀는 이것을 챙겨 집으로 가져가는데, 감자가 썩으면서 싹이 나기 시작한다. 이상하게도 바르다는 이 시점부터 자신에 대하여, 자신의 늙음에 대하여 말한다. 그런 뒤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하는 행위에 대해 말한다. 영화는 박물관의 창고에 잠들어 있던, 이삭 줍는 여인들이 태풍에 맞서며 거처로 돌아가는 그림이 바람에 휘날리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바르다는 왜 갑자기 자신의 늙음에 대하여 말하는가? 왜 갑자기 새로운 촬영 기술에 대하여 말하는가? 위 장면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자선영화,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숭고하게 조명한 영화로 남았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훌륭한 업적이며, 대상을 정확하게 담아내는 것이 바르다의 놀라운 강점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바르다는 ‘타인을 위하는’, ‘봉사정신’이 투철해야만 하는 장르의 영화에서 자신에 대해 말하는 이기적이고 나르시시트적인 선택을 함으로써 게임의 규칙을 위반한다. 세상 사람들을 이타적인 사람과 이기적인 이들, 이렇게 두 가지로 분류한다면 바르다는 분명히 전자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바르다의 솔직함과 용기는 늘 이러한 이분법을 거부한다. 어딘가에 속하고파 이런 이분법에 굴복하기 십상인 나로서는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다.
또 다른 예시를 들어보자. 가장 쉬운 예시를 들자면 <방랑자>의 주인공인 모나 캐릭터를 들 수 있다. 거처 없이 거지꼴로 프랑스 남부를 떠도는 젊은 여성 모나는 종종 낯선 이들에게 도움을 받는다. 어떤 이들은 그녀를 걱정하고, 동정하고, 그녀의 자유를 동경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바람직한 ‘도움받는 이’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모나는 무례하고, 게으르며, 한마디로 감사할 줄 모른다. ‘정상적 삶’이라는 게임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듯이, 모나는 ‘불쌍하면서도 아름다운 젊은 노숙자 여성’으로서 플레이하기를 거부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feXArfGm6C8
좀 더 어려운 예시를 들어보자. 바르다는 <행복>(1965)에서 부인이 투신자살 한 뒤, 남편이 그녀의 시신을 발견하고 그녀를 끌어안는 장면을 여러 점프컷으로 끊어 연출했다. 나는 늘 소위 말하는 누벨바그 영화에서 ‘영화 문법’ 혹은 ‘영화의 규칙’을 어기는 기법을 쓴 장면을 보면서 그 이상 그 이하의 것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바르다의 영화에서는 그 이상의 효과를 종종 느끼곤 한다. 여기서 바르다는 죽은 이를 표현하는 방법을 어기고 있다. 무겁고 숭고하며 슬퍼야 하는 장면이 어딘가 천박해 보이는 것이다. 이 아리송한 장면을 이후로 이전까지 지나치게 안전해 보이던 이 영화는 위험하고, 논쟁적이고, 그래서 섹시한 영화가 된다.
이 시리즈 아닌 시리즈를 연재하는 도중에 프랑스 파리로 교환학생을 와버렸다. 어제는 자크 드미와 아녜스 바르다가 잠든 몽파르나스 묘지를 찾았다. 누군가는 그들의 무덤에 반짝이를 뿌려놓았고, 많은 이들이 그들의 이름에 립스틱 자국을 남겨 놓았다. 하트 모양 감자도 보인다. 그들의 묘지 옆에는 나무 아래 잠깐 휴식을 취할 수 벤치가 있다. 바르다의 옆에 잠시 앉아 그녀와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나와 그녀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물론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 만날 일 없는 두 개의 평행선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이 두 평행선이 병치될 때, 그녀를 마주 보는 벤치가 아닌 그녀의 옆에 있는 벤치에 내가 앉을 때, 우리 사이의 빈 공간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취하는가? 바르다 또한 이런 고민을 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