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예술가 개념과 반예술가 앤디 워홀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를 떠올려 보자. 가장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예술가를 떠올려 보자. 각자가 떠올리는 예술가는 다르겠지만, 아마 그들은 고독하고 괴팍하면서도 타고난 재능으로부터 나오는 형언할 수 없는 아우라의 소유자일 것이다. 이러한 예술가의 형상은 미술, 패션, 영화, 문학 등 예술 분야를 가리지 않고 숭상되고 있다. 베레나 크라이거는 <<예술가란 무엇인가>>에서 예술가의 개념을 역사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우리가 예술가에 대하여 늘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밝힌다. 우리가 떠올리는 고독한 천재 예술가의 이미지가 보편화된 것은 불과 200년 전이다. 약 100년 전, 그러니까 ‘현대적 예술가’ 개념이 생겨난 지 10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몇몇 예술가들은 이 개념에 반대하는 전략을 세우기 시작한다. 이 도발은 1960년대 앤디 워홀이 뉴욕의 미술계에 등장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이 글에서는 크라이거의 <<예술가란 무엇인가>> 중 2장 <예술가, 천재로 불리다>와 7장 <반예술가, 거부의 전략>, 그리고 할 포스터의 The Anti-Aesthetic와 The Return of the Real를 바탕으로 현대적 예술가 개념이 어떻게 탄생했으며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예술가들이 이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는지 논할 것이다. 나아가 모더니즘 예술가들과 앤디 워홀의 초상화를 비교하면서 예술가의 자의식이 어떻게 변했는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무리 없이 예술가의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여기는 ‘창조성’은 원래 신으로부터 얻는 영감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예술 작품의 원천, 그러니까 ‘창조성’은 개인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는 한 인간의 수호신을 의미했던 ‘Genius’가 개인적인 특성을 의미하는 단어로 변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확연히 알 수 있다. (베레나 크라이거, <<예술가란 무엇인가>>, 조이한 외, 휴머니스트, 2010, p. 61.) 창조성 개념이 세속화되면서 “그는 창조적 정신을 지니고 있다”는 곧 “그는 창조적 정신 그 자체이거나 천재이다”로 바뀌게 된다. (Ibid., p. 62) 이로부터 작품의 원천이 예술가 그 자체로 변하게 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합리적 인식과 더불어 감수성이 미학에서 독자적인 인식 형식으로 자리 잡았고, 임마뉘엘 칸트의 <<판단력 비판>>(1790)에서도 관찰할 수 있듯, ‘순수예술’은 가치 상승을 누린다. (Ibid., p. 66)
이렇게 18세기에 창조적이고 순수한 천재로서의 예술가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19세기에 현대적 예술가 이미지가 보편화 되면서 그에게 ‘반시민적’이라는 새로운 특징이 추가된다. 이 예술가는 남달리 자유로운, 그러니까 반시민적인 사람이었다. 비더마이어 시대(1815년 1848년 사이 중부 유럽 시대의 중산층이 증가했던 시대)의 대표적 화가 카를 슈피츠베크의 <가난한 시인>(1839)와 같은 그림은 사회 주변부로 밀려난 예술가의 이미지가 당대에 이미 미화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림의 주인공은 진짜 시인이 아니라 ‘괴짜’, 혹은 의도적으로 합리성과 합목적성이라는 사회의 주도적인 판단 기준을 더 이상 따르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즐기기로 결정한 시민이다. 오늘날 ‘힙스터’나 ‘긱’으로 불리는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괴짜는 비더마이어 시대부터 전혀 이례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Ibid., p. 95)
그림 1 Michelangelo, St. Bartholomew displaying his flayed skin (a self-portrait by Michelangelo) in The Last Judgment, 1532, Sistine Chapel.
그림 2 Caravaggio,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1610, Galleria Borghese.
대표적인 반시민적 천재 예술가, 즉 현대적 예술가의 예시로는 예술가의 고통과 고독, 멜랑콜리를 보여준 미켈란젤로 (Ibid., p. 89.), 비참한 사회적 처지에도 자부심이 강했던 반아카데미주의자 화가 쿠르베 (Ibid., p. 85.), 그리고 고통 받는 예술가의 대명사 빈센트 반 고흐 (Ibid., p. 93.)를 들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그들의 자화상, 즉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았는지가 드러나는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최후의 심판>에서 고문을 당한 바르톨로메오 성인의 벗겨진 살가죽에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Ibid., p. 89.) (그림 1) 영광스러운 모습이 아닌 죽어가는 추한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자기혐오의 감정과 자기형벌의 충동이 관찰된다. 이는 살인죄를 저지른 후 추방과 망명의 삶을 살았던 카라바지오의 그림에서도 비슷하게 관찰된다. 카라바지오는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의 골리앗의 머리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음으로써 자기혐오의 감정,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대한 뚜렷한 자의식을 드러낸다. (그림 2) 이들은 사회에 편입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도 꿋꿋이 그 자리를 지켰다. 당대의 규범을 어김으로써 당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예술가로 남게 된 것이다.
그림 3 Gustave Courbet, Self-portrait with Pipe, 1849, Fabre museum.
그림 4 Vincent van Gogh,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and pipe, 1889, Kunsthaus Zurich.
쿠르베의 자화상에서는 비참한 사회적 처지에 있으면서도 자부심이 강한 화가의 모습이 관찰된다. 그는 석양이 지는 풍경을 등진 보헤미안으로 자신을 묘사함으로써, 사회의 주변인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자의식으로 충만한 태도를 뚜렷하게 표현하고 있다. (Ibid., p. 86.) (그림 3) 이는 그가 파리 코뮌에 가담한 죄로 감옥살이를 하던 시절 그린 <생트 펠라지의 자화상>(1872)에서도 관찰된다. 반 고흐의 초화상에는 쿠르베의 자신만만함은 없지만 프로테스탄트의 소박한 삶, 예술에 전부를 바친 삶의 응시하는 화가의 강인함이 배경색과 눈빛에서 보인다. (그림 4) 독자적이고 순수한 미술을 고집한 반 고흐의 예술가 이미지는 동료이자 라이벌 폴 고갱과의 논쟁, 그리고 유배 생활에 가까웠던 아를르와 생 레미에서의 이야기가 담긴 동생 테오와의 서신이 뒷받침한다.
이렇게 현대적 예술가의 개념이 완성된다. 현대적 예술가란 창조성 그 자체인 천재이며, 그는 비범하고 사회규범으로부터 지배 받지 않는 자유롭고 순수한 존재이므로 종종 반사회적이다. 그의 창조성은 사회규범으로 지배받기는커녕 새로운 규범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으로 여겨졌다. 반사회적인 그는 종종 멜랑콜리하고 고통에 빠져있으며 심지어 가난하기도 하다. 하지만 화가는 이러한 자신의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인식하고 있다. 현대적 예술가는 이런 자의식을 자화상에 반영하여 자신을 형벌하려는 가학적 태도를 보일지언정, 그런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기어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림 5 Marcel Duchamp, Fountain, 1917, replica 1964, Tate.
20세기에 들어서자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이 현대적 예술가 개념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현대적인 예술가 개념에 대한 아방가르드의 비판에는 평등주의적, 민주주의적 관점, 반식민주의적 관점, 문화비판적인 관점, 사회주의적 관점, 합리주의를 비판하는 관점 등 다양한 동기가 있었다.(Ibid., p. 275.) 그 대표주자로서 뒤샹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는 예술가가 무언가를 만든다는 개념, 그러니까 창조자로서 예술가 개념을 뒤집어 놓았다. <샘>이 대표하는 뒤샹의 레디메이드 작품은 예술가가 굳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Ibid., p. 281.) (그림 5) 하지만 뒤샹이 이끈 레디메이드는 작품의 원천으로서 천재-예술가라는 현대적 예술가 개념을 도리어 공고히 하는 결과를 낳았다. 왜냐하면 르네상스 시대부터 선이나 설계 도면은 화가의 영역이었으나, 색채로 그림을 완성시키는 것은 가치가 낮은 수공업으로 치부되어 조수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Ibid., p. 221.) 뒤샹과 레디메이드의 성공으로 인하여 작품 자체에 비해 화가와 그의 생각이 차지하는 우위는 더욱 공고해졌고, 이는 미술관이라는 제도에 의해 유지되었다.
할 포스터는 The Anti-Aesthetic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모더니즘은 문화의 자율성과 예술의 순수성을 강조하면서 힘을 발휘했다고 밝힌다. (“[Modernity] is still at work, say, in postwar or late modernism, with its stress on the purity of each art and the autonomy of culture as a whole.”, Hal Foster, “Postmodernism: A Preface”, The Anti-Aesthetic: Essays on Postmodern Culture, Bay Press, 1983, ix-xvi.) 20세기 중반을 지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모더니즘이 주장하는 ‘순수함’에 의문을 제기하는 새로운 아방가르드 미술이 등장했다. 새로운 아방가르드 회화에서는 팝아트가 등장했다. “모더니즘의 의미상 작품이란 독특하고 상징적이며 선지자인 반면, 포스트 모더니즘 의미상 텍스트란 “이미 쓰여져 있는”, 비유적이고 불확정하다.” “[...] work in modernist terms - unique, symbolic, visionary- than as a text in a postmodernist sense- "already written," allegorical, contingent.”, (Ibid.) 포스터가 ‘반-미학’으로 의미하고자 하는 바 또한 이전에 미학이 제시한 범주가 여전히 시의적인지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취향이라는 개념이 대중 매체와 같은 집단 중재에 의한 위협을 받지는 않는가” (“[...] are categories afforded by the aesthetic still valid? i.e. is the model of subjective taste not threatened by mass mediation?”, Ibid.)와 같은 질문이 그가 제기하고자 하는 의문점이다.
그림 6 Andy Warhol, High Heel Shoe, 1955,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그림 7 Warhol screen-printing in the Factory, ‘Andy Warhol ? “Giant” Size’, Phaidon.
전후 풍요로운 미국사회의 미술계에 등장했던 앤디 워홀은 포스터의 이러한 의문점에 대한 일종의 답변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워홀은 미술을 이상적인 판단기관으로, 미술가를 자율적 창조자로 보는 영웅적 개념의 불합리함을 20세기 초 뒤샹과 같은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이 했던 것보다 훨씬 성공적으로 보여줬다. (베레나 크라이거, op. cit., p. 301.) 50년대 뉴욕에서 패션, 식품, 공업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일러스트레이터로 왕성하게 활동한 후, 60년대부터 미술가로서 전성기를 누리며 당대 미술 영역과 대중문화 영역의 경계를 흐렸던 앤디 워홀은 다양한 방식으로 미술가와 미술의 현대적 개념을 공격했다.
워홀은 소품종 대량생산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롭기는커녕, 그것이 자신의 삶과 작품을 지배하는 현상에 매료된 듯한 태도를 보인다. 그가 남긴 “기계가 되고 싶다”, “내 삶이 나를 지배해 온 것이라는 말이 마음에 든다” (Jason Kass, et al. “Warholian Repetition and the Viewer’s Affective Response to Artworks from His Death and Disaster Series”, Leonardo, Vol. 51, No. 2, 2018, pp. 138-142.)와 같은 말은 상품화와 분업화가 일상을 지배하고, 미술과 일상의 구분이 사라진 상품-이미지 세계에서의 삶에 대한 첨예한 평으로 남는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반어적인 표현인지는 끝내 확인이 불가능하다. 바로 이 모호함 ambiguity과 그가 성공을 거두게 된 맥락이 드리운 모순이 그의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며, 현대적 예술가 개념을 공격하기에 충분하다.
미술가로서 앤디 워홀뿐만 아니라 그가 제작한 미술 또한 사회 규범으로부터 순수하지 않다. 워홀은 오히려 미술이 사회 규범으로부터 동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작품 ‘생산’ 기법을 통해 가장 직설적으로 보여줬다. 애초에 앤디 워홀이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은 대량생산 시스템 덕분이다. 워홀은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면서 뒤샹의 작품을 직접 살 수 있을 만큼 출세한다.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블로팅 선은 그가 빠른 시간 내에 대량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개발해낸 복제 방법이다. (그림 6) 사진이나 그림 위에 기름종이를 올려 잉크로 트레이싱을 한 후 마르기 전에 종이에 뒤집어서 만든 선으로, 도장과 비슷한 개념이다. 그가 미술계로 넘어오면서 (사실 그에게 이 경계는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실크 스크린 기법을 도입한 것도 대량생산을 위해서였다. (Sarah Urist-Green, et al. “Eat Like Andy Warhol”, The Art Assignment, PBS Digital Studios, 2019. 4. 12., https://www.youtube.com/watch?v=iy_27Y2YNck&ab_channel=TheArtAssignment (2021. 12. 14 참조.)) (그림 7)
앤디 워홀 또한 뒤샹과 마찬가지로 미술가의 붓터치 혹은 작품에서 드러나는 그의 내면세계가 중요하다고 여긴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뒤샹과 다르게 워홀은 미술을 (말 그대로) 찍어내는 그 과정을 즐겼고, 그의 미술 뒤에 미술품 그 자체보다 중요한 숨겨진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의 말에 따르면 오히려 그 정반대를 지향했다. “정확하게 똑같은 것을 많이 볼수록 의미로부터 멀어지고 기분은 좋아진다 (“the more you look at the same exact thing [...] the better and emptier you feel”, Jason Kass, et al. op. cit.)”, “앤디 워홀에 관하여 전부 알고 싶다면, 그저 나의 미술, 영화 그리고 나를 보기만 하면 된다. 그 표면에 바로 내가 있다.” (““If you want to know all about Andy Warhol, just look at the surface of my paintings and films and me, and there I am. There’s nothing behind it.” ANDY WARHOL, THE EAST VILLAGE OTHER, 1966.”, The Andy Warhol Museum.) 등의 코멘트가 그의 ‘납작함’에 대한 옹호를 방증한다. 납작함에 매료된 워홀은 입체감이 잘 구현되지 않는 폴라로이드나 저화질 캠코더같은 매체를 즐겨 사용했다. 그가 작품을 만들어내면 만들어낼수록, 대량생산 기법을 고안해내고 정교화시켜 갈수록 그것은 작품 뒤의 창조가로서 미술가를 지우는 효과를 낳았다. 굳이 그가 아닌 사람도 앤디 워홀의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의 스튜디오 ‘팩토리’와 ‘오피스’에서 그의 조수들이나 동료들이 워홀에게 의뢰된 작업을 하곤 했다. (Sarah Urist-Green, et al. op. cit.)
그림 8 Andy Warhol, Self-Portrait in Drag, 1981, Solomon R. Guggenheim Museum.
그림 9 Man Ray, Rrose Selavy (Marcel Duchamp), 1923, Man Ray Trust ARS-ADAGP.
워홀은 이러한 미술적 방식을 자신의 모습에도 적용한다. 1960년대부터 의료 사고로 인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수많은 실크스크린 자화상을 만들었다. 그는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변장한 모습, 예를 들면 드랙 drag 차림 (그림 8)이나 은색 가발을 쓴 모습을 찍어 덧칠하고 잘라내고 복사한 사진들을 사용했으며, 고도로 양식화된 자신의 골상 모습을 찍어냈다. 맨 레이가 찍은 뒤샹의 드랙 페르소나 사진과 달리 (그림 9), 워홀의 자화상은 그것이 워홀임을 알아볼 수는 있지만 워홀이라는 미술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전해주는 바가 없다. 뒤샹의 경우 아예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여 그의 여성 페르소나 ‘로즈 셀라비’라는 새로운 존재가 밝혀지지만, 워홀의 드랙 자화상은 그 무엇도 숨기지 않고 그 무엇도 새롭게 밝히지 않는다. 크라이거는 워홀의 자화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이전의 안과 밖의 자아 정체성인 미술가의 영혼과 골상은 파괴되었다. 워홀은 자신의 외모를 브랜드로 변형시켰다. 그는 자회상이라는 장르의 내용을 비웠고, 안에서부터 그것을 해체시켰다.” (베레나 크라이거, op. cit., pp. 300-302.)
그림 10 Andy Warhol, Self-Portrait, 1966, Museum of Modern Art.
그림 11 Albrecht Durer, Self-Portrait at the Age of Twenty Eight, 1500, Alte Pinakothek.
워홀이 66년에 완성한 자화상 복제 시리즈에는 이런 설명이 따른다. (그림 10)
His facial features, although always identifiable, also act as patterns of densely layered colour. The image is painted in such a way as to minimise Warhol’s human qualities. Any expressive paint handling is suppressed by the silkscreened surface. Warhol said his intention was to ‘completely remove all the hand gesture from art and become noncommittal, anonymous.’
작품에 나타난 그의 이목구비는 알아볼 수는 있지만, 빽빽하게 레이어된 색의 패턴으로 작용한다. 워홀의 인간적인 특징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어, 일말의 표정을 보여주는 페인트 기법은 실크스크린으로 완성된 표면에 의해 억눌러졌다. 워홀의 말에 따르면 이는 ‘작품으로부터 모든 손길을 지우고 특징이 없는 익명의 상태에 이르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 익명의 효과, 개성을 지우는 효과는 뒤러나 쿠르베와 같은 이들의 자화상과 비교하면 확연히 드러난다. (Ibid., p. 54) 특히 뒤러의 자화상은 ‘정면’에서 예술가의 상반신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11) 이러한 자세를 취한 전면 자화상은 유일한 전범인 그리스도의 이콘화를 암시적으로 가리키며, 독특한 서명을 사용하여 자신의 자화상을 여타 자화상과 구별한다. 자신의 개성과 자부심을 드러내고자 했던 이들과 달리, 워홀은 “나는 할리우드를 좋아한다. 그들은 아름답다. 모든 게 플라스틱이다. 나는 플라스틱이 좋다. 나는 플라스틱이 되고 싶다”라고 말하는 등 자신의 외모를 마음에 들지 않아했고, 몰개성을 옹호했다. (“I love Los Angeles. I love Hollywood. They're so beautiful. Everything's plastic, but I love plastic. I want to be plastic.”, Bockris, Victor and Gerard Malanga, Up-tight: the Velvet Underground story, Omnibus Press, 2002, p. 66.) 이런 자화상에서 엿볼 수 있는 워홀의 자의식은 대도시의 ‘팩토리’ 노동자에 불과한, 남들과 ‘똑같은’ 익명으로서 자신의 모습이다.
그림 12 Andy Warhol, Self-portrait with skull, 1978, Tate.
그림 13 Andy Warhol, Self-portrait (Strangulation), 1978, Tate.
그림 14 Andy Warhol, Self-portrait being punched, 1963-66, Tate.
워홀의 자화상은 납작할 뿐만 아니라 종종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연출을 하여 자조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60년대 이후 워홀의 자화상에서 나타나는 죽음과 폭력의 이미지는 다름 아닌 본인이 죽음을 가까스로 면하는 경험을 해서로 추정된다. 워홀은 1968년 자신의 스튜디오 ‘팩토리’에서 일하던 발레리 솔라나스에 의해 총살당할 뻔했다. 이후 워홀은 60년대 초반에 작업했던 Death and Disaster 시리즈에 이어서 죽음이라는 주제에 집착하게 된다. 총살미수사건 10년 이후 다시 자화상 작업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입을 살짝 벌린 포즈를 취함으로써 자신의 모습을 ‘메멘토 모리’의 전통적인 상징인 해골과 병치한다. (Tate online caption, “Andy Warhol, Self-portrait with skull, 1978, Tate”, Tate.) (그림 12)
하지만 이러한 해석 또한 역시 워홀의 증언에 의하여 반증된다. 워홀은 자신이 총에 맞았을 때 자신에게 직접 벌어지는 사건이 아닌 TV에서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제 3자에게 벌어지는 일과 같이 느껴졌다고 밝혔다.
“Before I was shot, I always thought that I was more half-there than all-there—I always suspected that I was watching TV instead of living life. People sometimes say that the way things happen in movies is unreal, but actually it's the way things happen in life that's unreal. The movies make emotions look so strong and real, whereas when things really do happen to you, it's like watching television—you don't feel anything. Right when I was being shot and ever since, I knew that I was watching television. The channels switch, but it's all television.” Stiles, Kristine and Peter Howard Selz, Theories and Documents of Contemporary Art: a Sourcebook of Artists' Writing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6, pp. 345–.
“총을 맞기 전에는 완전히 몰입되었다기보다는 정신이 반은 다른 데에 가 있었다고 늘 생각했어요. 실제로 삶을 사는 대신 TV를 보고 있다고 항상 의심했지요. 영화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방식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가끔 말하곤 하는데, 사실 현실적이지 않은 것은 실생활에서의 사건이 일어나는 방식입니다. 영화에서는 감정은 아주 강렬하고 현실적인 것으로 연출하는데, 실생활에서 사건이 일어나면 TV를 보는듯한 느낌이 들어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제가 총을 맞고 있던 바로 그 순간, 그리고 그 이후로 계속 저는 제가 TV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채널은 바뀌어도 여전히 TV 속 일이에요.”
이렇게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당사자의 증언이 상충하기 때문에 워홀의 작품은 그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모호하며 아이러니하다. 목에 졸려 죽는 듯한 모습은 그가 실제로 겪은 근사체험이라든지 그의 이전의 Death and Disaster 시리즈의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림 13) 워홀의 표정과 과장된 연출은 60년대 초반에 완성한 Self-portrait being punched에서 비슷하게 관찰되는 자조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Oliver Lurz, “Andy Warhol, Self portrait (Strangulation), 1978, Tate”, Tate, 2011. 10.) (그림 14) 즉, 어떤 끔찍한 감정을 고백하려는 비극적인 이미지로 볼 수도 있고 단순한 놀이에 불과한 희극적 이미지가 될 수도 있다.
그림 15 Andy Warhol, Self-Portrait, 1986, Tate
워홀의 Death and Disaster 시리즈에 이어서 그의 작품을 시뮬라크르 simulacre로 볼 것인지 재현으로 볼 것인지, 그러니까 의미 없는 기호로 볼 것인지 아니면 고통을 고백하려는 전략으로 볼 것인지 (Hal Foster, op. cit.)에 대한 논의는 자화상에서도 이어진다. (그림 15)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서는 두 입장을 각각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리빙스톤에 따르면 무엇이 페인트질을 한 것이며 무엇이 그려진 것인지, 어디까지 다른 사람에 의해 실행된 과업이며 어디까지 워홀만이 할 수 있었던 결정에 의한 것인지, 무엇이 우연에 의한 것이며 무엇이 통제의 결과인지 사이에 존재하는 의도적 모호함이 워홀의 작품의 결정짓는 특징이다. 이런 주장은 워홀의 미술은 대부분 방법과 매체에 관한 것, 그러니까 표면 위에 있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주장을 지지한다.” (“Livingstone has argued that ‘a deliberate ambiguity between what is printed and what is painted or drawn, between tasks and decisions executed by someone else and those that only he could undertake, between chance and control, becomes a crucial feature of Warhol’s art, and lends support to the notion that what his art was about was, in large part, its methods and mediums – in other words, just what is on the surface’ (Livingstone in McShine 1989, p.63).”, Jo Kear, “Andy Warhol, Self-Portrait, 1986, Tate”, Tate, 2015. 10.) "한편 예술사학자 카터 랫클리프는 워홀 자화상의 피상적이기만 해석을 주의하라고 하며 ‘그의 표면이 가끔 비어있고 무감각하긴 하지만, 그 뒤에는 외상적 존재 혹은 몰개성화되고 임의적인 현대 사회의 깊은 자각이 숨어있다’고 주장한다.” (“The art historian Carter Ratcliff has warned against a solely superficial reading of Warhol’s portraits, arguing that ‘as blank and anesthetised as his surfaces sometimes are, they hide depths of a traumatised self or a deep sense of the random and depersonalised tragedy of the modern world’ (Ratcliff in Shafrazi 2007, p.21).”, Ibid.)"
할 포스터는 The Return of the Real에서 앤디 워홀이 한 말이나 그의 작품에서 관찰되는 것은 ‘텅 비어있음’이라기보다 ‘충격’이라고 말한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방식에 너무도 충격을 받은 존재가 자신에게 충격을 준 대상의 특징을 따라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기계가 되고 싶다”는 말은 곧 “나 또한 기계이다. 나 또한 연쇄적으로 상품-이미지를 찍어낸다 (혹은 소비한다), 나 또한 내가 받는 만큼 좋은 (혹은 나쁜) 것을 생산한다”로 해석된다. 포스터는 이를 연쇄적 생산과 소비의 사회가 만들어낸 반복의 강요를 미리 포용하는 워홀의 전략으로 인식한다. “그 사회에 완전히 뛰어들어 편입된다면, 자신만의 과장된 예시를 통하여 그것의 자동성, 심지어 자폐성을 폭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여기서 포스터는 이 ‘비-주체성’을 수행하는 워홀의 주체성이 존재하는지 도통 알 수 없다는 사실에 그의 작품의 매력이 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이 충격의 표현이 그가 수행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충격으로 인하여 수행하는 주체마저 사라진 것인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포스터는 다음과 같은 말로 문단을 마무리한다. “똑똑, 자동성 안에 누구 계신가요?” (“Usually this statement [of “I want to be a machine”] is taken to confirm the blankness of artist and art alike, but it may point less to a blank subject than to a shocked one, who takes on the nature of what shocks him as a mimetic defense against this shock: I am a machine too[.] […] a preemptive embrace of the compulsion to repeat put into play by a society of serial production and consumption. If you can’t beat it, Warhol suggests, join it. More, if you enter it totally, you might expose it; that is, you might reveal its automatism, even its autism, through your own excessive example. […] Yet the fascination of Warhol is that one is never certain about this subject behind [this figure of nonsubjectivity that presents it as a figure]: is anybody home, inside the automation?” Hal Foster, et al. “Traumatic Realism”, The Return of the Real: The Avant-garde at the End of the Century, Mit Press, 1996, pp. 130-131.)
어쩌면 워홀이 의도했던 대로 그는 많은 이들에게 브랜드와 같은 존재이다. 앤디 워홀은 이름 뒤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닌, 팝아트와 교체 가능한 대명사가 된지 오래이다. 하지만 그 또한 이 세상을 해쳐나가던 사람이었고,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미술가였다. 특정 범주를 나눠놓고 사람이든 예술이든 분류하려는 사회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반응한 사람. “누군가는 밥줄이어야 하지 않겠느냐” (“Someone has to bring home the bacon.”, Sarah Urist-Green, et al. “The Case for Andy Warhol”, The Art Assignment, PBS Digital Studios, 2015. 5. 29., https://www.youtube.com/watch?v=7VH5MRtk9HQ&ab_channel=TheArtAssignment (2021. 12. 14. 참조.))라는 말을 하면서 끊임없는 작품 활동을 하면서 동료들을 먹여 살리려는 책임감을 짊어졌던 미술가. 협력의 옹호자이자 삶과 미술의 경계를 흐리는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그의 이미지는 홀로 팝아트를 열어젖힌 독보적 천재이다. 후기 자본주의라는 게임의 가장 뛰어난 플레이어이자 유령의 집 속 거울과 같았던 포스트 모더니즘 미술가의 이미지는, 여전히 굳건한 모더니즘의 시스템에 의해 창조적이고 순수한 예술가의 이미지로 굳어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1. 분석 대상
Caravaggio,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1610, Galleria Borghese.
Michelangelo, St. Bartholomew displaying his flayed skin (a self-portrait by Michelangelo) in The Last Judgment, 1532, Sistine Chapel.
Courbet, Gustave, Self-portrait with Pipe, 1849, Fabre museum.
Duchamp, Marcel, Fountain, 1917, replica 1964, Tate.
Durer, Albrecht, Self-Portrait at the Age of Twenty Eight, 1500, Alte Pinakothek.
Ray, Man, Rrose Selavy (Marcel Duchamp), 1923, Man Ray Trust ARS-ADAGP.
Van Gogh, Vincent,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and pipe, 1889, Kunsthaus Zurich.
Warhol, Andy, High Heel Shoe, 1955,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 Self-Portrait, 1966, MoMA.
, Self-portrait being punched, 1963-66, Tate.
, Self-portrait with skull, 1978, Tate.
, Self-portrait (Strangulation), 1978, Tate.
, Self-Portrait in Drag, 1981, Solomon R. Guggenheim Museum.
, Self-Portrait, 1986, Tate.
Warhol screen-printing in the Factory, ‘Andy Warhol ? “Giant” Size’, Phaidon.
2. 저서
Bockris, Victor and Gerard Malanga, Up-tight: the Velvet Underground story, Omnibus Press, 2002.
Foster, Hal, “Postmodernism: A Preface”, The Anti-Aesthetic: Essays on Postmodern Culture, Bay Press, 1983.
Foster, Hal, et al. “Traumatic Realism”, The Return of the Real: The Avant-garde at the End of the Century. Mit Press, 1996.
Kass, Jason, et al. “Warholian Repetition and the Viewer’s Affective Response to Artworks from His Death and Disaster Series”, Leonardo, Vol. 51, No. 2, 2018.
Stiles, Kristine and Peter Howard Selz, Theories and Documents of Contemporary Art: a Sourcebook of Artists' Writing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6.
크라이거, 베레나, <<예술가란 무엇인가>>, 조이한 외, 휴머니스트, 2010.
3. 미술관
The Andy Warhol Museum, Pittsburgh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City
Solomon R. Guggenheim Museum, New York City
Tate, London
4. 동영상
Urist-Green, Sarah et al. “The Case for Andy Warhol”, The Art Assignment, PBS Digital Studios, 2015. 5. 29.
, “Eat Like Andy Warhol”, The Art Assignment, PBS Digital Studios, 2019. 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