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체 이다진 인터뷰

by puppysizedelephant

* 아래 글은 2020년 1월 빅이슈 219호에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https://brunch.co.kr/@bigissuekorea/186


2018년 나른한 눈의 쌍둥이 모델로 등장하여 숱한 포토그래퍼와 에디터의 시선을 사로잡은 이다진은 같은 해 여름, 올 블랙 앤 화이트로 구성된 컬렉션을 선보였다. 끈이 주렁주렁 달린 비대칭 블라우스는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웠고, 한복 원단으로 만든 드레스는 하이패션에서도 스트릿에서도 볼 수 없었던 에로틱하면서도 편안한 룩을 제안했다. 빠르게 품절된 ‘a moist bone’ 컬렉션을 시작으로 한 시즌도 쉬지 않고 아방가르드 여성복을 선보이고 있는 nache의 대표 이다진을 을지로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저는 이제 26살이 되었고,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섬유패션디자인과에 재학 중인 모델이자 디자이너 이다진입니다.


부산에서 서울에 올라온 계기는 디자인하고 싶어서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고 올라온 거였거든요. 홍대 가고 싶어서 재수하고 뜻하지 않게 국어국문학과를 갔어요. 패션디자인 복수전공을 하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요. 포트폴리오도 딱히 수업 들은 걸로는 모자라고 해서. 그러다가 겨울방학 중 학교에서 창업 지원 프로그램이 있다는 걸 듣고 그걸 통해 패턴 학원 다니면서 샘플을 만들게 됐어요. 그때 인스타그램으로 한 세 품목 팔게 됐는데, 더 해보고 싶어서 홈페이지도 만들었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즌별로 시작하게 된 것 같아요.


제가 원래 옷에 관심이 많은데, 진로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을 안 해봤었어요. 그러다가 부산에서 다니던 대학에서 필수 교양으로 '진로와 자기 계발'이라는 수업을 들었어요. (웃음) 거기서 어떤 분이 패션디자인 MD쪽으로 일하고 싶었는데 자기가 서울에 못 간 게 너무 후회된다는 거예요. 그때 '어, 나 진짜 여기 있어도 되나' 생각이 들고, 그다음 날에 PC방을 갔다 왔는데 갑자기 너무 현타가 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다음날 자퇴했거든요, 엄마한테 말 안 하고. (웃음) 그때부터 학교 다니는 척하면서 대학 도서관 가서 공부하고. 한 한 달 후에 엄마 아빠한테 말했죠. 사실 자퇴했다고. '가서 나도 옷 관련된 걸 해봐야겠다'는 다짐으로, 서울을 먼저 가겠다는 생각으로 재수하게 됐어요.


1-2.jpg


제가 아방가르드를 진짜 좋아하는데 솔직히 진짜 예쁘고 드레이핑 많이 들어간 거는 일단 국내에 여성 아방가르드 브랜드를 제가 못 봤거든요. 그런 걸 사려면 다 구제로밖에 구할 수가 없는 거예요. 지금 아방가르드 브랜드는 거의 남자나 유니섹스로만 하잖아요. 아방가르드 여성복을 하면 진짜 여성스럽게, 예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아무도 안 할까 해서... 제가 패턴을 배웠어도 진짜 조금 배운 거라서 잘 못했거든요. 그래서 그냥 집에서 패턴 만들어서 입어보고 '어, 잘못했다' 싶으면 다시 해보고. 그런 식으로 패턴을 기본만 배우고 나머지는 다 직접 하면서 배웠어요. 간단히 해서 됐다 싶으면 샘플실에 맡겨서 만드는 방식으로 했었어요.


처음에 좀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비효율적으로 했던 것 같아요. 하나의 큰 작품을 만들 듯이 다 샘플실에 맡기고. 패턴을 제가 원하는 대로 뜨고 싶어도 여러 품종을 하기에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서. 한편, 샘플실에 맡기면 돈도 돈인데 원하는 대로 안 나오고 단순하게 나와서, 그거 때문에 힘들었어요. 이게 공장을 알면 다 할 수 있는 거였는데 저도 이쪽으로 아예 일을 해본 적도 없고, 비전공자였으니까. 지금도 시행착오를 많이 하는 거 같아요. 스카프라든지 니트라든지 항상 새로운 거를 만들고 싶으면 다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거니까.


2-1.jpg


모델과 디자이너가 비슷한 분야긴 하니까 도움받는 것도 많은 것 같아요. 일단 자극을 좀 많이 받는 것 같아요. 제가 이런저런 옷을 입어보다 보면, ‘아, 이거 진짜 이렇게 잘 만들었는데’ 이런 생각도 들어서 자극을 많이 받고. 아, 그리고 생각보다 원단이 안 어울리는 경우가 있어요. 원단 진짜 맘에 들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단단해서 갑옷처럼 돼버리는 거예요. 솔직히 상품 출시를 못 하는 것도 엄청 많거든요, 샘플까지 다 봤는데도. 일단 편해야 입을 수 있는 거잖아요. 왜냐하면 저도 입어보다가 너무 불편해서 ‘진짜 이거 어떻게 입고 다녀’ 이런 것도 간혹 더러 있거든요. 패턴을 앞뒤 판을 너무 똑같이 짜서 진짜 불편하다거나. 이런 경험으로 버튼 들어가는 게 싫더라도 실용성을 고려하면 넣게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영향을 많이 끼친 것 같아요.


전 공장에서 제가 사장님이라고 말 안 해요. 지금 나타나는 여성 차별이 거의 실체 없이 나타나고 있는 거잖아요. 은근히 무시하는 것도 제가 느꼈다고 말할 수 있고, 그런 경우 많아요. 제가 사장 아니라 위에 도매하는 사장님이 있는데 거기서 일한다고 하면 더 잘 해주신다거나, 출구 일정이 더 앞당겨진다거나. 제가 맨 처음엔 이런 걸 모르고 제가 사장님이라고 했었어요. 근데 저도 이제 그런 말을 안 하게 되는 거예요, 제가 사장이라고. 어린 여자라서 받을 수 있는 무시 같은 거. 그런 게 일할 때는 많이 느끼는 것 같아요.


그렇게 치면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것 같고... 근데 제가 손해 봐서 포기하기가 진짜 싫어요. (웃음) 남 때문에 포기하기가 싫은 거? 일하면서 힘든 것도 있긴 한데, 사업이라는 거 자체가 백프로 제 일이잖아요. 그래서 힘든 것도 제 몫이긴 한데 좋은 일이 있거나 성과가 있으면 그것도 일단 제 몫이니까, 이게 정직하게 딱딱 나눠지잖아요. 누구 탓할 게 없고. 그래서 전부 그렇듯이 힘들다가도 좋은 일 있으면 그걸로 버티게 되잖아요. 그리고 저는 솔직히 이걸 하면서 스트레스받긴 받는데 ‘이거 진짜 안 해야겠다’ 이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본 것 같아요. 하다 보면 재밌기도 하고, 일단 결과물이 이렇게 눈에 딱 보이잖아요. 옷을 입거나 할 수도 있고. 예를 들어 이런 인터뷰하는 것도 좋은 일이잖아요. 그런 일로 계속하는 것 같아요. 언제 올지 모르는 그런 좋은 일 때문에.


1-3.jpg


을지로라는 동네 자체가 진짜 멋있는 동네잖아요. 현실적으로 사무실을 구하기에 값이 제일 싼 동네이기도 하고. 일 끝나고 딱 나갔는데 홍대처럼 사람이 진짜 많거나, 동대문은 저녁 되면 완전히 죽은 도시처럼 되잖아요, 종합상가 주변에는. 제가 한번 그런 때 가볼 때가 있는데 진짜 기분이 별로인 거에요. 근데 딱 여기에 오면 심신에 안정이 된다고 해야 하나? (웃음) 여기서 그냥 커피 마시고 이렇게 있으면 일할 맛이 들어요. (웃음) 그것도 그렇고 주변에 영감 주는 데도 진짜 많고, 앤티크한 데도 많고 갤러리도 있고... 그리고 이 동네에서 젊은 사람이 좀 없잖아요. 저만해도 이 거리에 있는 젊은 사장님들은 거의 아는 것 같거든요. 억지로 그렇다기보다는 왔다 갔다 커피 마시고 그러다가 그냥 알게 되는 거 같은데, 여기 계신 분들 보면 실험적인 분들 많고 되게 열정 있으신 분들 많거든요. 그런 거 보면서 영감이라기보다는 자극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을지로로 사람들이 모이는 것 자체가 저렴한 거 진짜 한몫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다들 작업실이 필요한데 수익이 많은 상태가 아니니까 저렴한 곳이 필요하기 때문에 을지로가 커진 거잖아요. 을지로는 옛날 한국적인 맛에 오는 장소인데, (재개발 이후로는) 그런 게 많이 사라질 것 같아요. 일단 이 동네 분위기 자체가 없어질 것 같아요. 건물에서 오는 그런 느낌도 큰데 이런 게 다 철거되고... 그러다 보면 당연히 집값도 오를 거고. 서울에서 이런데 남아있는 데가 거의 유일하잖아요. 이젠 그런 느낌이 있는 동네가 서울에서 찾기 힘들 것 같아요. (을지로는) 위치적으로도 너무 좋으니까.


이건 저만의 방법일 수 있는데,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저는 큰 계획을 세우면 진짜 안 와 닿거든요. 큰 계획을 세우면 그걸 지키기도 힘들뿐더러 번아웃도 많이 오잖아요. 저도 이걸 하면서 그렇게 된 적이 있었어요. ‘나중에 이걸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절대 생각대로 잘 되지도 않고, 다 단계적으로 되는 일인데 큰 거부터 생각하면 너무 쉽게 지치는 것 같아서... 일단 겁먹지 말고 작은 일부터 했으면 좋겠어요.


포토그래퍼: 민가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