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 이야기 | 밀양
화목한 개미 가족이 있다. 그 누구도 해한 적 없는 착한 아기 개미가 바깥 구경을 나갔다 압사당한다. 선인지 악인지 모를 그야말로 천진난만한 손가락을 가진 가해자가 제 아빠에게 묻는다.
내가 잘못한 거지?
괜찮아. 용서해 줄게.
아기 개미의 주검을 발견한 엄마 개미가 할 수 있는 건 단장지애의 고통을 느끼다 숨이 끊어지는 것뿐이다.
벌레 이야기 이청준 1985년
이창동의 <밀양>으로 영화화된 벌레 이야기는 1981년 이윤상 군 유괴살인사건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얼개는 거의 유사하다.
어린 아들 알암이 유괴되어 살해되자 그 어머니가 교회를 찾아가 위안과 평화를 얻어 범인을 용서하려 하지만, 사형언도까지 받은 범인이 먼저 신앙적 구원과 사랑 속에 마음이 평화로워져 있음에 절망하여 도리어 자살을 하고 만다는 이야기.
조금은 다른 원작 소설과 영화
공통적으로 아버지는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서 '아버지의 부재'는 중요한 키워드다.
영화 밀양에서는 아버지의 사망으로 인해 아예 존재하지 않고, 벌레 이야기에서의 아버지는 심드렁한 관찰자 같다. 아버지의 역할이 희미한 두 작품에는 삶을 끌어주는 조력자들이 등장하지만 역할은 판이하게 다르다. 소설 속 김집사는 주님의 섭리와 사랑을 설교하며 알암엄마에게 구원의 빛이 내리 꽂히기를 바란 사람이었고, 영화 속 종찬은 신애가 자신을 마주하게끔 빛을 그러모아 줄 거울을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부재가 공통점이라면 이름의 유무는 큰 차이점이다. 인간으로서 삶을 지탱하려면 이름이 있어야 한다. 밀양 속 신애는 종찬에게 신애 씨라고 불린다. 이름을 가진 개인은 섭리자에게 도발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알암엄마는 이름이 없었다. 이름 없는 개인(민중)은 앞서 언급한 엄마 개미와 다를 바 없다. 섭리자(종교적 의미인 신, 정치적 이미인 세력, 포악한 담론등)의 사랑의 의미는 너무나 불가해하고 이 불가해한 사랑은 힘없는 약자에겐 폭력일 뿐이다.
또 하나
아이의 이름인 알암.
'앎' Knowledge 이란 , 지혜,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통하는 내용. 즉, 상식을 의미한다.
알암을 잃은 알암엄마는 주체에서 객체로 전락하는 상식이 파괴된 세계를 의미한다. 이 이름에 관한 설정 하나가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뚜렷한
알레고리다. 오독일 수 없다.
_다만 한 가지 여망이 있다면 저로 하여 아직도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에도 주님의 사랑과 구원이 함께 임해주셨으면 하는 기원뿐입니다. 저는 그분들의 희생과 고통을 통하여 오늘 새 영혼의 생명을 얻어가지만, 아이의 가족들은 아직도 무서운 슬픔과 고통 속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이나 저세상으로 가서나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아이의 영혼을 저와 함께 주님의 나라로 인도해 주시고 살아남아 고통받는 그 가족분들의 슬픔을 사랑으로 덜어주고 위로해 주십사고...
ㅅ ㅂ ㅅ ㄲ의 기도
주님의 사랑과 인간적 고뇌사이에서 무참히 찢겨 나간 알암엄마는 가해자 김도섭의 아찔한 마지막 말을 들은 후 인간이고 섭리고 다 포기한 채 약을 마신 후 절망의 뿌리를 끊어낸다. 나였다면 신애보다는 금자가 되는 박찬욱의 방법을 택했으리라.
1980년 5.18의 가장 큰 가해자인 전두환
1981년 취임했고 그 해 일어난 이윤상 군 유괴사건에 담화문까지 발표했다. 파렴치하게도 '유괴범이 없도록 하고 사람을 죽이지 않도록' 운운하며 사건에 개입했다. 더 큰 가해자가 또 다른 가해자를 용서 또는 단죄하고 피해자에게 위로를 건네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의 은폐. 이 책에서 처음 접한 아연실색할 이 사실에 나는 기겁했지만 차츰 환호했다. 작가의 작품들에 명징하게 드러날 '의미'들을 찾아내고 싶어서다.
1985년에 벌레 이야기를 발표한 이청준은 피해자의 상처가 사라지기도 전에 가해자에게 먼저 구원과 평화를 주는 섭리자의 사랑의 의미에 대해 묻고 있었다.
영화 밀양 포스터의 '이런 사랑'은 종찬의 사랑의 방식뿐 아니라 섭리자의 사랑을 내포한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몰라 헤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섭리자에게는 사실만 있고 이유는 없었다. 하여 사실로서의 섭리자의 사랑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해 왔다.
나는 여태껏 잘못된 질문의 답을 찾고 있었다.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당위로서 섭리자의 사랑의 의미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벌레 이야기》 이청준
웅크린 전도연이 힘없는 벌레인줄 알았더니
진짜 벌레는 따로 있었다.
● 도서 : 벌레 이야기 - 이청준
● 영화 : 밀양 - 이창동
● 관련 도서 : 요망한 입술로 두 사람의 인생을 망쳐놓고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속죄하고 구원을 얻은 소녀 이야기- 이언 매큐언의 #속죄
● 관련 영화 : 끝끝내 구원을 얻지 못한 피해자 박찬욱의 #친절한금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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