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대홍수 | 알랭 바디우의 '사건'

by 무화



열 살이었다.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던 내가 올려다본 건 창으로 들어온 빛, 그 빛이 일렁이던 뽀오얗고 불온한 잔물결이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공포보다 먼저,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감각이 느껴진다. 몸이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도 전에, 세계의 규칙이 갑자기 작동을 멈추는 느낌. 숨을 쉬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는 상태.

그러니까, 내 세계가 멈추었다는 기묘한 감각의 파동에 '죽음'은 떠밀려가고 없었다. 세계가 설명 없이 무너질 수 있다는 낯섦 처음으로 몸에 새겨진 사건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물을 ‘위험한 대상’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대신 어떤 경계가 무너지는 장소로 기억한다. (같은 맥락으로 술에 절여진 채 파도 속으로 뛰어들던 아빠를 보며 나는 무언가 아슬아슬하게 찌릿한 감정에 사로잡혔었다. 어른들이 보기엔 그저 물이 무서워 우는, 아빠가 죽을까 봐 우는 울보.)


애니웨이! 이전까지 당연하던 질서—몸, 호흡, 판단—가 더 이상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배운 자리였다. 물론, 몇 번이나 꽥꽥거리며 우스꽝스럽게 파닥거리던 날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안 누군가가 튜브를 던져줬지만.


말하자면, 이 경험은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으스스한 남천동의 그 수영장


지금부터 나는 이 사건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영화 대홍수에 대한 내 소회를. 내 맘대로 징글징글하게 설하고자 한다. 거듭 말하지만 이건 나만의 감상이고, 나는 그 어떤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보았고. 마찬가지로 그 어떤 사후 정보도 캐지 않았으므로 과잉 또는 오판, 그것도 아니라면 허세 쩌는 개소리를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하므로,

지리멸렬이 예상인 이 글을 보기 어려우신 분들은 끝으로 내려 결론을 보시거나, 문제 제기를 하셔도 좋습니다. 덧붙여, 담담댄스님께 애니레온하트웨이로서, 홀연히 사라지지 않음을 거듭 밝히는 글이기도 합니다.




'사건''알레고리'


사건이란 무엇인가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은 서사적 반전이나 극적인 계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세계의 질서 안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균열이며, 이전까지 자신을 규정하던 규칙과 정체성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는 어떤 순간이다. 사건은 무엇이 일어났는가 보다, 그 이후 세계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다. 바디우에게서 주체는 사건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주체는 오직 사건 이후, 그 균열에 충실하려는 태도 속에서 뒤늦게 구성된다.


바디우의 사건은 세계에 새로운 의미를 추가하기보다, 익숙했던 세계가 더 이상 자명하지 않게 되는 상태를 만든다. 사건 이후에도 사물과 관계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것들을 연결하던 판단의 기준은 작동을 멈춘다. 이때 남는 것은 해석이나 설명이 아니라, 세계와 자신 사이에 생긴 낯섦이다. 사건의 효과는 단절이 아니라 지속이며, 그 지속 속에서 삶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정렬되지 않는다.




알레고리는 이 사건을 개념적으로 해설하는 방식이 아니다. 알레고리는 세계 전체를 하나의 구조로 제시함으로써, 관객이 그 의미를 ‘이해’하기보다 ‘통과’하게 만든다. 특정 상징ㅡ메타포ㅡ 하나가 의미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리듬·인물의 배치 방식 자체가 하나의 질서를 형성한다. 알레고리적 영화에서 중요한 질문은 “무엇을 뜻하는가”가 아니라 “이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가”다. 의미는 설명이 아니라 체험 이후의 잔상으로 남는다.




재난이 아니라 사건으로서의 〈대홍수〉



〈대홍수〉는 외형상 재난 영화의 문법을 따른다. 물은 차오르고, 공간은 붕괴되며, 생존의 조건은 급격히 변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홍수는 그저 단순한 배경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지탱하던 질서—자아, 관계, 판단 기준—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는 사건의 조건이다.



영화는 재난의 원인을 설명하거나, 질서의 회복을 서두르지 않는다. 대신 홍수 이후의 세계를 하나의 상태로 제시한다. 좁아진 공간, 반복되는 동선, 과열된 소리와 이미지 속에서 인물들은 더 이상 이전의 자신으로 기능할 수 없다. 붕괴되는 것은 도시나 시스템이 아니라, 자아를 가능하게 했던 인식의 틀 이다.



이 지점에서 〈대홍수〉는 명확한 해답을 거부한다. 영화는 사건을 해결하지 않고, 사건 이후의 세계에 머문다. 이 태도가 이 영화를 단순한 재난 영화가 아니라, 사건의 알레고리로 읽히게 만든다.




아이를 찾는 반복 ― 투사된 자아



주인공의 여정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이를 찾는 행위다. 회문형인 안나[ANNA]라는 이름을 통해, 순환되듯 무수히 반복될 그녀의 운명을 짐작할 수도 있다. 이 반복은 보호 서사윤리적 사명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물론. 모성애나 착한 사마리아인 같은 클리셰가 등장하지만 이 요소는 비교적 힘이 약하다.) 오히려 아이는 주인공이 끝내 분리해 두었던 자신, 혹은 더 이상 동일하게 설명될 수 없는 자아의 투사로 기능한다. 영화의 엔딩에서 나는 옆에 있던 이에게 외쳤다.


아니, 이건 자아 찾기잖아!


아이의 위치는 항상 어긋난다. 쉽게 도달되지 않고, 발견되었다고 확정되지도 않는다. 이는 아이가 명확한 대상이 아니라, 주인공 내부에서만 작동하는 질문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이는 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건 이후 주인공 안에 생긴

지워지지 않는 질문이 머무는 위치다. 그래서 찾는 행위는 끝나지 않고, 결말도 닫히지 않는 것. 아이를 찾는 여정은 구조적으로 자신을 찾는 여정과 겹쳐지지만, 그 찾기는 회복이나 통합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매일 밤 꿈속에서 달려가던 영화 <로봇 드림>의 로봇이 부상하며 눈물이 컼!



주인공이 끝내 마주하는 것은 ‘잃어버린 나’가 아니라, 이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이는 구원의 은유가 아니라, 사건 이후의 세계에 끝까지 머물게 만드는 알레고리적 장치가 된다. 아이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 자체가,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에 대한 충실성으로 읽힌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 계열과의 접점



이 구조는 〈Edge of Tomorrow〉를 비롯한 일련의 영화들과 같은 계열에 놓인다. 그 영화에서 반복은 성장이나 숙련의 서사가 아니다. 매번 맞이하는 죽음은 기존 자아의 폐기이며, 반복은 자기 동일성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과정이다. 주인공은 더 나은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자신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상태로 밀려난다.



〈대홍수〉는 시간 루프 대신 동선과 선택의 반복을 통해 같은 질문을 던진다. 아이를 찾는 행위는 문제 해결의 수단이 아니라, 사건 이후의 세계에 끝까지 머물겠다는 태도다. 반복은 진전을 보장하지 않지만, 그 반복 속에서만 주체는 형성된다.


이 계열의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다루는 것은 ‘자아의 발견’이 아니라, 자아라는 질서의 붕괴 이후를 어떻게 견딜 것인가라는 문제다.


지금 이 시점.
붕괴 라는 단어를 보고 움찔하신 분이 있다면,

맞습니다. 그겁니다. 헤어질 결심의 해준의 그 붕괴붕괴... 사실, 사건이라는 개념은 이 영화보다 헤결에 더욱 걸맞은 단어이긴 하다. 설명하긴 너무나 지리하므로 일단, 패스

사진이라도...




애니웨이! 〈대홍수〉는 이를 재난의 밀도와 신체적 피로라는 고온의 조건 속에서 수행한다.




끝나지 않는 사건



〈대홍수〉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관객을 하나의 상태 속에 위치시킨다. 재난은 지나갈 수 있지만, 사건은 끝나지 않는다. 영화가 끝난 뒤 남는 질문은 “주인공은 무엇을 얻었는가”가 아니라, “나는 여전히 나라고 말할 수 있는가”다.


이 영화가 알레고리로 작동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거듭 말하지만 〈대홍수〉는 홍수를 통해 무언가를 상징하는 대신, 정체성이 붕괴된 이후의 세계를 한 번 살아보게 한다. 아이를 찾는 여정은 끝나지만, 그 여정이 호출한 낯선 자아의 문제는 관객 안에서 계속 작동한다.


재난은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사건은 설명되지 않는다.

〈대홍수〉는 그 설명 불가능한 상태에, 끝까지 머무는 영화다.




이 글은 영화가 제공하는 유일한 해답이 아니라, 이 작품이 허용하는 하나의 통과 방식에 가깝다.

중언부언하며 개소리를 늘어놓은 이유는.

나는 이 영화가 충분히 영화적 소명을 다 했다 보기 때문이다. 몹시도 뜨거워졌으니까.



애니웨이!


누운 채로 천장에 쏜 영화를 통과하던 나는 베갯잇을 세 번 적셨고, 옆에 있던 이는 감기 걸렸어? 하고 물었다.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