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poem을 위한 poetry
시의 양미자(윤정희)는 진료실 창가에 놓인 꽃을 보고 반색한다.
어머, 동백꽃이네! 제가 동백꽃을 너무 좋아하거든요. 겨울의 꽃, 붉은 고통의 꽃. 꽃 중에서 붉은 것은 고통이거든요. 요즘 시 쓴다고 공부 좀 했어요.
저거 조화예요
영화 초반 양미자는 타인의 고통을 직시하지 못한다. 진료실에 가기 전 거리에서 망연자실한 희진(죽은 소녀)의 엄마를 보거나 병원에 들어가 대기실의 Tv속 울부짖는 팔레스타인 여성을 보았을 때, 또 협상을 위해 찾아간 소녀의 엄마와 마주했을 때 그녀는 타인의 진짜 고통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잠시 멈춰 서거나, 슬쩍 바라보기만 하고 고통의 근원이 뭔지, 진짜 고통이 뭔지 모른 채 그저 얄팍하게
'붉은 것은 고통이거든요'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어깨가 아파 병원을 찾은 양미자는 타인의 고통은커녕 자신의 진짜 고통조차 몰랐던 존재다. 나처럼, 우리처럼.
동사가 기억 안 나실 거예요. 동사, 아시죠?
네, 동사 알죠.
명사가 제일 중요하잖아요
소녀를 위한 제일 중요한 명사 애도가 휘발되기 전에, 가해자들을 향한 명사 분노가 수그러들기 전에, 머릿속 수첩의 그 명사들 아래에 밑줄을 꾹 그었다. 잊을지언정 잃을 수는 없으므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명사 '속죄'를 잃기 전에 그녀는 움직인다. 성당으로, 학교 과학실로, 소녀의 집으로, 강으로. 명사 다음으로 중요한 건 동사 動詞 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몸을 움직인 건 양미자밖에 없다.
문학의 기능ㅡ효용ㅡ적 측면에서 그녀의 움직임 자체를 시라 볼 수도 있다. 타인의 고통을 체화해 가는 여정아래 그토록 어려웠던 시 쓰기가 가능해진 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완성된 시는 양미자와 소녀가 함께 쓴 시가 되고 그 옆에 놓인 꽃은 이런 점에서 다중적 의미를 내포한다. 소녀를 위한 애도와 양미자의 첫 작품을 위한 소녀의 헌사. 현상은 늘 양면성을 가진다. 인간이 완전히 붕괴되지 않고 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사람은 몸을 항상 깨끗하게 해야 해
그래야 마음도 깨끗해지지
합의금만으로 '깨끗하게' 속죄하려던 가해자의 부모들과 양미자는 달랐다. 그녀의 '깨끗한 속죄'는 샤워기의 물줄기만으로 해결되는 일이 아닌 매우 치밀하게 계획된 절차, 이를테면 제의와 같았다. 시 이전 이창동의 전작이며 '피해자의 고통'을 다룬 밀양의 연장선상에서 보자면 매우 적절한 대처라 할 수 있다. 합의금, 법적 처벌, 애도, 그리고 마지막 action.
이 처연하고 고적한 의식은 poetry를 해나가는 과정, 즉 시와 세계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면밀히 보여준다.
양미자 그녀 자체가 시ㅡpoemㅡ가 되는 결말.
살구는 스스로 땅에 몸을 던진다. 깨여지고 발핀다. 다음 생을 위해_양미자의 메모
줄곧 하늘만 바라보며 아름다운 것들을 찾던 양미자는 땅에 떨어져 짓이겨진 살구를 본 후 시선을 바꾼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빗물로 얼룩진 수첩에는 더 이상 시상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이 번지고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야 하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야 완성되는 서사는 시상이 된다.
이 영화에는 수많은 상징이 등장한다. 영화 그 자체로 밀도 높게 압축된 시, 알레고리인 셈이다. 심지어 친절한 이감독은 과감한 오프닝을 통해 현현한다. 범인이자 범인인 우리를 책망하듯.
여러분, 시 어렵지요? 시는 이런 겁니다. 보물찾기 하듯 땅을 판다고 나오는 것도 아니고, 하늘 저 높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있는 자리 거기서 보는 거예요. 거기서 얻는 거라고요. 눈높이에 맞춰 흘려보낼 테니 잘 보십시오. 옆에 써줄게요. 보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시 같은 건 죽어도 싸
혹자는 이창동의 영화들은 너무 문학ㅡ시ㅡ적이라고 비판한다. scene과 sequence가 사라지고 행과 연만이 남아 과도한 술래잡기를 한다고 폄하한다. 일부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개성이다. 글 잣던 작가는 영상 예술에도 거미줄을 칠 수밖에 없다. 천성이니까.
시가 죽어 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시 같은 건, 죽어도 싸! 다는 황병승의 자조는
시 같은 건 죽어도, 싸. 라는 한탄으로 들린다.
시는 뭔가라는 질문은 산다는 건 뭔가라는 질문이다. 어떻게 하면 시를 쓸 수 있나라는 질문은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나라는 질문이다. 진짜에 대한 고민은 잘 '보아야' 가능해진다.
삶에 대한 고민은 결코 싸지 않다.
그리고 나는 요즘.
시가 뭔가라는 질문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 영화 : 시 - 이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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