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 케빈에 대하여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어."
케빈이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내뱉은 이 한마디는, 끝내 설명되지 않던 존재가 처음으로 자신의 내면아이를 내보인 순간이다.
설명도, 변명도, 용서도 아닌
오직 멈춰버린 내면의 아이가 처음으로 울음을 내는 순간.
에바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도 자신 안의 오래된 아이를 꺼낸 채,
처음으로 아들을 이해하려 들지 않고, 그냥 존재하도록 둔다.
이 장면은 『케빈에 대하여』라는 영화 전체가 향해 온 도착점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가 맞닥뜨리는 타자의 얼굴과 나 자신의 균열을 보여주는 윤리적 순간이다.
영화 내내 에바는 케빈을 '이해'하려 했다.
왜 그는 다른 아이들과 다를까?
왜 애정에 반응하지 않을까?
왜 나는 엄마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 질문들은
"왜 너는 나처럼 되지 않니?"라는 전제를 품고 있다. 이것은 ‘이해’라기보단,
‘동일하게 만들고 싶은 통제의 욕망’ 이다.
타자는 나에게 결코 흡수될 수 없는 존재이다.
타자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종종 타자의 타자성을 지우려는 폭력이다.
_ 레비나스
에바는 끊임없이 ‘모성’의 틀 안에서 케빈을 규정하려 하고, 해석하려 하고, 교육하려 한다. 그러나 케빈은 그런 언어 바깥에 존재한다. 그는 불편하고 불가해한 타자다. 그의 작은 티셔츠처럼, 자라지 않은 채, 이해되지 않은 채 머물러 있다.
이해되지 않는 타자를 마주할 때,
우리는 흔히 존재론적 불안에 빠진다.
‘왜 나는 그를 알 수 없는가’
‘내가 만든 존재가 나와 전혀 다르다면, 나는 누구인가’
그래서 사람은 타자를 설명하려 하고, 분류하려 하고, 동일시하려 한다.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노력이라도 하는 것이 타자에 대한 애정이라 착각하고 그 모든 애씀이 비뚤어진 자기 권능감임을 모른 채 시도한다. 그러나
그 시도는 때로는 폭력의 시작이 된다.
“그때는 아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모르겠어”
그 자체로 존재의 불가해함을 인정하는 고백
에바는 처음으로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그를 이해 불가능한 존재 그대로 바라본다.
'타자의 얼굴 앞에서 나는 무조건적으로 책임져야 할 타자성 자체를 마주한다' 는 윤리의 장소.
그 순간 둘의 내면아이가 서로를 본다.
그건 화해도 치유도 아닌, 단지 말 없는 인정,
‘이해 없이도 함께 있을 수 있음’의 가능성이다.
『케빈에 대하여』는 타자를 향한 모든 이해의 언어가 때로는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폭력일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말한다.
우리는 끝내 타자를 알 수 없을지라도,
옆에 가만히 머물 수는 있다고.
그것이, 우리가 타자 앞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윤리적인 일일지도 모른다고.
● 도서 : 다섯째 아이 - 도리스 레싱
● 영화 : 케빈에 대하여 - 린 램지
Cinema Reading Enjoy Artistic
Moment 크림북클럽 2025년 7월
당신은 Control Freak 이야.
그래, 인정한다. 이해가 오염돼 있었다는 걸.
실은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이해하고자 하는 무망한 노력에 속절없이 무너지기도 한다는 걸. 나의 내면아이의 두려움과 슬픔과 외로움과 아픔이 아직도 그대로라는 걸.
왜 어떤 기억들은 냄새처럼 휘발되지 않는가.
왜 그 기억들을 끊임없이 재생시키는가.
그 아이는 그래야만 살 수 있었어.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어.
이제야 나는 너를 '본다'
케빈에 대하여의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