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와 질문들 사이에서, 다시 한 번 톨스토이를 읽다
고등학교 2학년 봄과 여름의 경계 즈음, 엄마가 돌아가셨다. 수학여행 중이었던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강원도에서 내가 사는 충청도로 혼자서 긴 시간을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몽롱한 상태로 이동했다. 따뜻한 날씨였음에도 마지막으로 만져본 엄마의 몸은 너무 서늘했다. 3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될 정도로 충격이었다.
그 후 내 안에서는 쓰나미처럼 많은 질문들이 몰려왔다.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엄마를 기억하는 사람들마저 세상을 떠나면 엄마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하지만 이런 질문들은 며칠 생각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대입 수험생이었다. 결국 나는 내 안에 가득한 질문들을 서랍 속에 잠시 넣어두기로 했다. 이 질문들에 매몰되어 내 미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음 해 말, 다행히도 나는 대학에 합격했다. 처음에는 무척 기뻤다. 그러나 며칠 후부터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감정이 나를 찾아왔다. 대학만 합격하면 이것저것 해보겠다고, 리스트를 작성해 가며 대학 시험이 끝나기만을 고대했던 나였는데, 시험이 끝나고 나를 찾아온 것은 지독한 허무함이었다. 처참할 만큼 허망했고, 뭔가에 속은 듯한 느낌이었다. 이 점령 세력 앞에 나의 버킷리스트들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이지? 앞으로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
대학 생활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서도 이 허무감과 공허함은 나를 놔주지 않았다. 대학에만 가면 뭔가 새로운 세상이 열리면서 행복해질 것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러면서 내가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질문들이 다시 날아들었다. 대학 생활 틈틈이 이런 질문들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내 안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어느 날에는 아침에 일어날 힘도 없었다.
"어차피 죽을 인생이라면 굳이 아등바등 살 이유가 뭐지? 그냥 지금 죽어도 상관없는 일인 건 아닌가?"
다만 죽는 방법이 마땅치 않을 뿐이었다.
그 무렵 내 손에 들어온 책이 톨스토이의 고백록이었다. 어떻게 읽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하게 기억나는 건, 그 당시의 내 고민들을 톨스토이가 비슷하게 안고 있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는 것이다. 나만 이런 고민을 한 건 아니었구나. 홀로 낯선 곳을 헤매다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러시아 정교회의 신앙 안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던 톨스토이는 열여섯의 나이쯤에 본인의 판단으로 모든 신앙적인 활동을 중단하고, 교회에 가는 것도 그만두었다. 그 후 그는 글을 쓰면서 명성과 돈을 얻기 시작했다. 34세에 열여덟 살의 아내를 맞아 15년 동안 13명의 자녀를 낳으며 행복한 가정생활에 푹 빠져 살았다. 그의 삶은 가정과 아내와 자녀들이 전부였고, 가족이 먹고 살 재산을 늘리는 일에 전념했다. 그 사이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발표했다.
그의 나이 마흔아홉, 그의 삶은 모든 면에서 절정에 달했다. 아내와의 사이도 좋았고, 자녀들과도 행복한 관계였다. 일을 전혀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부유했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알 만큼 유명했으며 모두 그를 칭송하며 존경했다. 정신적·육체적으로도 건강했다. 흠잡을 데 없는 삶이었다.
그런 그에게 예기치 않은 손님이 불쑥 찾아온다.
"인생은 무엇이고 어디로 가는 것인가?"
"내 인생 속에는 죽음으로도 파괴되거나 사라지지 않는 어떤 의미가 존재하는가?"
"누구나 죽고, 죽음 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이런 의문들 앞에서 그의 삶은 급작스럽게 빛을 잃고 만다. 인생이 무의미하고 끔찍한 것을 알게 되자, 그전에 그에게 기쁨을 주었던 모든 것들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변해버렸다. 숲에서 길을 잃었다는 사실에 공포에 사로잡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길을 찾으려는 사람의 심정이었다. 자살의 유혹이 너무 선명하게 다가와서, 혼자 총을 들고 사냥을 나가지 않으려 애썼고, 집 안의 노끈들을 치워야 했다.
그는 해답을 찾아 당대의 현인들을 만나 대화해 보기도 하고, 소크라테스, 쇼펜하우어, 석가모니 등 과거의 현자들에게 기대를 걸어보기도 했다. 불교와 이슬람교에 관한 책들도 연구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그가 원하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가 버렸던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가 희미한 흔적을 다시 붙잡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발견했으면 하는 희망을 갖고 하나님을 찾아 헤맸고, 예전에 기도했던 습관으로 다시 돌아가서 내가 찾고자 했지만 발견할 수 없었던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를 주관하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자마자, 그 즉시 나는 내가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가능성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지속되지는 않았다.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기쁨을 느끼다가도, 갑자기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절망의 나락 속으로 빠져드는 일이 두세 번이 아니라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반복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어느 이른 봄날, 그는 숲 속을 혼자 거닐며 지난 3년 동안 내내 생각해 왔던 것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안에서 어떤 음성이 느껴졌다.
"하나님은 존재한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는 것은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이다. 하나님을 찾는 삶을 살아라. 하나님 없이는 삶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그 안에 있는 모든 것과 그 주변의 모든 것이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더 강력하게 환해졌고, 그 이후로 그 빛은 그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살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나도 톨스토이처럼 나만의 방법으로 진리를 찾아보려고 했다. 화학 전공자였던 나는 종교학과의 ‘세계 종교사의 이해’라는 과목을 수강하고, 이슬람 관련 책을 뒤적였다. 그러다 결국 진리는 성경에 있거나, 아니면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닿았다. 그래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에 다니긴 했지만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고, 그 당시 내게는 신앙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황당한 내용들에 책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지금 시대에 이런 동화를 진리라고 믿으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계속해서 읽다 보니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시는 분인가 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경을 공부할 때면, 희한하게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희망과 기쁨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러다 또 의심이 찾아오고, 그 의심은 다시 나를 어둠과 절망으로 끌어당겼다. 톨스토이가 겪었던 상태가 거의 똑같이 내게도 재현되었다.
그는 3년 만에 그런 상태에서 해방되었다지만, 나는 대략 7년이 넘게 걸린 것 같다. 톨스토이는 숲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나는 혼자 방 안에 있었다. 오랫동안 믿음과 의심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데 지쳐 간절하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를 이 어정쩡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땀이 날 만큼 오래 기도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그 흔들리던 상태를 벗어날 수 있었다.
20대에 이 책을 처음 읽고, 40대에 다시 읽었고, 이제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또다시 책을 펼쳤다. 150년 전 톨스토이가 숲 속에서 붙들어낸 그 고백이, 다른 언어와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내 인생에도 계속해서 파문을 일으킨다. 허무를 통과한 자리에서, 책은 다시 한번 하나님을 향해 시선을 들라고 조용히 권한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권유에 응답하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