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보조작가 경력 쌓기도 쉬운 게 아니네

1장의 9번째 이야기 : 작가님이 흔들리면 보조작가는 나가떨어진다

by 기린아놀자


내 이름을 건 드라마나 영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지만,

여러 작품을 하신 드라마 작가님의 보조작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늘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보조작가 구하면 꼭 얘기해 달라고 말하고 다녔다.

시나리오를 썼던 시간이 더 길었기 때문에

드라마 호흡과 노하우를 기성 작가님의 옆에서 가까이 보며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의 인맥에 작가 선배님이 있길 바랐다.

그러다 원작이 있는 드라마를 4개 정도 만드신 작가님의 보조작가 제안이 들어왔다.

당장 하고 싶다고 의사를 전달했고 작가님과 미팅을 진행했다.

작가님은 스릴러 장르를 많이 쓰셨는데, 난 스릴러가 어려운 장르였기 때문에

보조작가 경험 및 장르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작가님의 작품 중 꽤나 좋아하는 작품도 있었다.




작업실에서 진행된 미팅에서 작가님은 부드러운 말투에 여유가 느껴졌지만

보조작가로 내가 잘할 수 있을지 세심하게 보시는 느낌이 들어 꽤나 긴장되었다.

내가 나이가 많고, 작가님이 생각하시기에 경력이 많아서 보조작가를 해도 괜찮겠냐는 우려를 하셨는데

보조작가를 하고 싶었고, 드라마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라 꼭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작가님께서 준비하는 작품은 '청소년 불법도박'을 다루는 이야기였다.

지금은 청소년의 불법도박에 대한 문제 인식이 명확해지고, 수면 위로 많이 올라와 있지만

당시엔 청소년이? 불법도박? 막 떠오른 문제로 알려진 게 많이 없을 때였다.

그래서 보조작가는 나 말고 대학교를 막 졸업한 20대 후반의 남자분도 같이 할 예정이라고 하셨다.

그 보조작가님이 불법도박에 대해 아는 것도 많고, 실제 해 본 적도 있다고 했다.

작가님께서 두 명의 보조작가를 두신 이유를 너무 알 것 같았다. 그래서 함께 작가님을 잘 도와서

작품을 만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작가님과 함께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기뻤다.

보조작가의 업무는 다 다르겠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작가님 작업실에 일주일에 한 번 출근해서 전체 회의를 하고

나머지 기간 동안에는 작가님께서 전달한 씬 부분의 글쓰기를 해서 보내면 되었다.

작가님께서 요청한 자료 조사 및 기존 자료에 대한 정리도 하고

내가 추가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자료도 조사해서 작가님께 전달하기도 하였다.


같은 장면을 두 명의 보조작가가 같이 써야 한다는 게 살짝 경쟁 같기도 하고..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그냥 내 스타일로 감정선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쓰자고 맘먹고 열심히 작업을 했다.

일주일이 한 번 만나서 진행하는 회의도 즐거웠고

소재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면서 전혀 몰랐던 세계에 대해 알게 되는 사실이 충격이었는데

작품이 잘 만들어져서 세상에 위험성을 알려야 한다는 다짐도 들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의문이 들었다.

작가님께서 이 작품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중심이 보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작가님께 회의 때 물어도 시원한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의문이 들었던 이유는 작가님께서 요청하신 장면을 쓰긴 하는데..

회의가 취소되는 경우가 잦았고, 메신저로 다음 업무에 대해 전달받았는데

작가님께서 이야기를 더 발전시켜서 우리에게 다음을 요청하는 게 아니라 쓴 부분을 쓰고 또 쓰거나

다 뒤집고 설정이 완전히 바뀌어서 아예 새로 쓰거나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나의 작업이 작가님에게 보조작가로 도움이 되는 걸까?

피드백이라도 받고 싶었지만 없었다.

나 혼자서 작가님께서 이런 작업을 계속 이어가면서 가장 좋은 이야기를 쓰고자 하시는 거겠지.. 추측했다.

내가 뭘 쓰는지.. 도움이 되는지 잘하고 있는지 모를 시간이 흐르다

소재가 우리가 잘 모르는 부분이 있을 테니 실제 소재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나

청소년들이 도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센터 등의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했다.

일정에 대한 조율은 나 말고 다른 보조작가님이 맡았다.

나는 인터뷰 사전에 필요한 질문이나 체크사항들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평소에 단톡방에서 연락을 하던 작가님께서 개인톡으로 내일 만날 수 있겠냐고 연락이 왔다.

아. 이거 좀 느낌이 안 좋은데?

나 잘리나 보다.. 싶었다.

보조작가 시작한 지 2달째 되는 날이었다.


다음날, 작가님 작업실에서 만났는데 안 좋은 예감대로 나는 잘렸다.

작가님은 이 프로젝트를 아예 접을 생각이라고 했다.

작가님 본인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어느 정도 써 놓은 상태에서 했어야 했는데..

원작이 있는 작품들만 주로 하다가 처음 오리지널로 하면서 보조작가들이랑 이렇게 작업하는 방식을

시험해 보고 싶었는데 아닌 것 같아서 정리한다고 말씀하셨다.

다른 보조작가님은 인터뷰 일정을 조율하고 있어서 그걸 정리하고

다음 주에 그만두는 걸로 할 예정이라고 했다.

(솔직히 당시엔 나만 잘린 거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작가님의 후속 작품이 나오지 못하는 걸 보니 다 정리된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현재이다)


그렇게 바로 연락받고 다음날 보조작가 업무가 끝나 버리고 말았다.

머리로는 작가님이 이해되었다.

해야 할 이야기는 안 풀리고, 근데 보조작가 월급은 나가고..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우리를 자르는 게, 도움을 주는 거라고 생각하셨을 것 같다.


근데 마음으로는 작가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무슨 이야기를 할지 어느 정도 써 놓은 상태에서

좀 더 시너지를 내기 위해서 보조작가와 함께 작업을 했어야지..

무슨 이야기를 쓸지 모르겠지만 맘에 드는 소재 하나만으로 보조작가들이 쓰는 글을 보고

맘에 들면 하고.. 아니면 말고.. 하는 거를 시험해 보고 싶다는 말로 포장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보조작가를 하며 배우겠다는 희망도 파사삭 사라지며

아픈 교훈을 얻었다.

작가가 흔들리면 보조작가는 나가떨어진다는 것.

행여 내가 작품을 맡아서 쓰는데 보조작가와 함께 하게 된다면.. 절대 이러지 말아야지.. 배웠다.


더하여 아무리 드라마를 여러 개 했어도

작품을 쓰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란 것도 배웠다.

드라마 작가로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렇게 나는 작가님과 연락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이제 뭘 쓰면 좋을까? 하고 있던.. 얼마 후.. 작가님에게 연락이 왔다.

좀 놀랐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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