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의 네 번째 이야기 : 어느 제작사든 내 작품을 보려고 한다.
지금은 빙하기라고 할 만한 이쪽 바닥이지만..
되돌아보면 코로나 시기에 작가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고 느낀다.
그래서 아마 나와 비슷한 분들은 제작사와 작가 미팅을 많이 하지 않았을까?
나도 최종 드라마 집필 계약 직전에는
"이제 미팅 좀 그만했으면 좋겠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거 같아.."
란 배부른 소릴 했었다. (미팅 자체를 못하는 지금.. 그때가 나았었나? 싶을 때도 있다)
나를 어필하는 것과는 별개로 미팅에서 가장 힘든 것은 내 작품을 보고자 하는 제작사를
얼마나 믿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나의 아이템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무리 말해도 입이 아프지 않을 지경이다.
비록 작품을 다 읽고 나서 별거 없네, 재미없네라고 생각할지라도 어느 부분이 어디서 어떻게 쓰이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걸 경험한 적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팅을 진행하면서 어김없이 나오는 말.
"작가님이 쓰신 글 1-2개 정도 보여주실 수 있나요?"
란 질문이 큰 스트레스였다.
'보여주실 수 있나요?'라는 질문은 '보여줘'와 같은 말이었다.
내가 어떤 글을 쓰는지..
어느 정도의 글을 쓰는지..
나의 글을 봐야 제일 잘 알 수 있다는 점은 알고 있다. 당연하다.
그러나 작품을 보내면서 드는 불안감? 그것이 늘 나를 괴롭혔다.
'재미없다고 하면 어쩌지?'
'아이템이 유출되거나 하면....?'
그 와중에 습작이 어떤 것이든 글을 보내주기만 하면 상관없다는 쪽은 그나마 낫다.
회사에서 판권 계약을 한 웹툰이나 웹소설의 장르와 비슷한 습작을 보길 원하는 곳도 꽤 많다.
내가 그동안 써왔던 글들이 딱 맞아떨어지면 상관없지만
내가 쓰지 않았던 (예를 들면, 공포) 장르라면 괜히 움츠러들고
진작에 써두지 뭐 했냐.. 후회와 자책이 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르는 없지만
그 장르도 잘 쓸 수 있다고 어필하면서 작품을 보내곤 했다.
여러 불안과 스트레스가 뒤섞인 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순 없었다.
그래서 일련의 미팅을 거치면서 나만의 원칙을 세웠다.
1. 작품은 꼭 이메일로 전달한다. 증거를 남기기 위해.
간혹 카톡 같은 메신저로 보내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흔적이 남는다고는 하지만
나는 꼭꼭 이메일로 보내라고 하고 싶다. 메신저는 그만큼 다른 이들에게 공유가 쉬워서 내가 모르는 새에
쉽게 작품을 보내고 받고 하는 걸 직접 눈으로 보았다.
2. 작품을 전달할 때, 이메일에 상세한 내용을 꼭 명시한다. 예를 들면,
작가 계약을 위한 지난 *월 *일 ### 에서 진행한 미팅 중에 피디님께서 요청하신 저의 작품 (혹은 시나리오, 단막극 대본)을 보내드립니다. 혹시라도, 미팅의 연장선상으로 보내드린 작품이라 다른 분들에게 공유는 안 해주셨으면 합니다. 만약 공유가 필요하시다면 저에게 얘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용은 그때그때 조금씩 달랐지만, 우리가 미팅을 했고 요청에 의해 작품을 건넸다는 점.
작품을 건넨 목적등을 적었다. 괜히 혹시나 좀 찜찜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땐 내용을 더 상세하게 적어서 메일을 보냈다.
3. 보낸 메일을 꼭 저장해 둔다. 혹시라도 삭제되지 않도록.
그리고 담당자에게 메일을 발송했음을 문자로 연락하고 그 내용도 남긴다.
4. 저작권 등록을 한다.
내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아이템. 내가 꼭 언젠가 이 소재와 이야기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겠다!!!!
그런 것이 있다면 저작권 등록을 하고, 표지에 그 사항에 대한 정보를 기록 후 작품을 보낸다.
그런데 만약 진짜 소중한 아이템이면... 보내지 않는 편이었다. 나 같은 경우엔..
5. 절대 한글 파일로 보내지 않는다.
PDF 파일이라 해도 텍스트가 다 복사되는 세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한글 파일로는 절대 안 된다.
간혹 나에게 모니터를 부탁하거나 할 때가 있는데, 아직도 한글 파일로 보내는 경우가 참 많다.
그때마다 충격을 좀 받는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막이었다.
요즘엔 제작사에서도 배려를 많이 해주셔서 작품을 함부로 공유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에 하나.. 혹시라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미팅에 부정적인 느낌인 것 같은데 아니다.
절대 아니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미팅에 임했고 사실 준비도 많이 했다.
"좋아하는 영화가 뭐예요?" 란 질문도 받은 이후로 그 답변도 적절하게 다시 준비하곤 했고
"읽으시는 책 있으세요" 란 질문도 받은 적 있는데, 이후로 읽는 책도 확인했다.
늘 미팅 10분 전에 도착해서
화장실에 먼저 들려 얼굴상태도 확인하고 손도 씻으며 숨을 고르고 미팅에 임했다.
손톱을 정갈하게 정리하는 것도 필수적이었다.
열과 성의를 다했다.
그래서였을까?
미팅을 하고 나오면 늘 손이 떨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너무 마신 탓도 있겠지만
당이 훅- 떨어지는 것이었다. 다른 생각도 안 들고, 무조건 집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집에 도착하면 짐을 다 던져두고 쓰러지듯 누워서 자곤 했다.
누군가에게 나를 어필하고 긍정적인 인상을 주기 위해 애쓰는 것,
내가 나이를 먹었지만, 그동안 작가라는 직업을 갖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내공을 쌓았고
경험이 있는지, 그래서 제작사에서 나에게 맡기고자 하는 프로젝트를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표정을 관리하고 적절한 언어를 선택해 말을 한다는 것.
참으로 쉽지 않았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제작사 미팅 때마다 똑같이 반복되었다.
게다가 당시엔 원작 계약이 많았을 때라, 미팅 전에 그 원작을 보고 가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럼 해야 할 것들.. 어필해야 할 것들도 늘어난다.
이 원작을 내가 재밌고 깊이 있게 읽었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드라마로 만들기 위해서 어떤 방향성으로 하는 게 좋을지 계획을 잘 세워야 했다.
제작사에서 사전에 말해주지 않았지만 이미 갖고 있는 방향성과
나의 방향성이 일치하길.. 아니 적어도 비슷한 점이 많길 바라면서...
혹시라도 어긋날 것 같으면 재빨리 눈치껏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의 생각을 말하도록
이끌어 내면서 나의 생각과 비슷한 점이 있으니 같이 발전시켜나가면 될 것 같은 느낌을 줘야 했다.
솔직히, 드라마로 만들기 부족한 원작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걸 말할 순 없었다. 제작사는 이걸 재밌다고 생각해서 원작 계약을 한 것일 텐데!!!
최대한 장점을 끌어내서 드라마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모으고 담아서 포장해야 한다.
으어-
쓰는 지금도 그때를 떠올려보면.. 에너지가 빠지는 느낌이 든다.
근데 이게 젤 큰 문제는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미팅을 많이 해도 계약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이 없다는 것이다. (내 개인적 경험상)
그럴 때마다 헛헛한 기분이 드는데, 그걸 스스로 잘 달래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다.
결국 미팅을 하면서 습작뿐만 아니라 내 영혼도 빨려 들어가는데..
모든 것을 다 버텨내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이건 글을 잘 쓰고의 문제 이전에 필수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리고 혹시라도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일 때를 대비할 작가님들이 계신다면..
이 말만은 전하고 싶다.
- 최대한 다양한 장르의 습작물을 갖고 계시길.. 언제 어떤 제작사에서 무슨 장르를 원할지 모른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해 뒀어. 느낌으로.
- 미팅 후, 고갈된 에너지를.. 헛헛한 마음을 달랠 나만의 방식, 나만의 방법을 하나쯤 갖고 계시길..
나 같은 경우엔, 걷기 그리고 화이트 와인이었다. 거기에 향이나 초를 피워두면 더 좋고..
덧,
시간이 지난 지금.. 화이트 와인이 부족하여 위스키로 대체되었다.
보관도 용이하고 한잔만 마셔도 취기가 올라와서...
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