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원작 작가 미팅을 하고 싶었던 이유 (1)

1장의 다섯 번째 이야기 : 어딘가 모른 게 찜찜한 느낌

by 기린아놀자


영화 촬영 현장에서 스크립터를 하면서 친해진 지인의 소개로 기획 PD님을 소개받았다.

원래 영화 쪽에서 일하던 분인데, 코로나와 맞물려 드라마 쪽 회사에 취직하게 된 분이었다.

나에게 제안이 오는 일들이 늘 그렇듯,

제작사에서 웹툰 원작을 갖고 있는데 개발하던 작가님이 개인사정으로 계약을 이어가지 못해서

그 자리를 대신할 신인작가를 찾고 있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어서 우선 미팅을 진행했다.

지인이 나를 좋게 얘기해 줘서 첫 만남부터 호의적이었고 미팅 분위기는 꽤 좋았다. (좋았다고 기억한다)

원작의 장르는 판타지, 액션, 히어로물이었다. 공모전에서 상도 받은 작품이었다.

(웹툰 공모전에 대해선 잘 몰라서 그렇구나.. 넘겼던 정도이다)

이야기를 나눠본 끝에 내가 내린 판단은 작업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오리지널로 써본 적 없는 장르였지만 웹툰 원작에서 히어로 주인공의 능력이 설정되어 있었고

그 능력을 중심으로 이야기와 갈등구조는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건 중심으로 이어지고 웹툰에선 액션 요소를 주를 이룬 표현이 많아서

드라마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물들의 감정선을 발전시켜야만 했다.

같이 작업을 진행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들은 세부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1. 우선 3개월, 월급 150만 원, 기획작가처럼 작업을 진행한다.

2. 3개월이 지나서 더 연장할 수 있다.

3. 계약 후, 3개월 이내에 4부 줄거리까지 작업한다. (가능하면 1-2부 대본까지)

4. 공개되어 있는 웹툰 원작으론 드라마 1부 정도뿐이라 나머지 이야기 개발을 위해서 원작 작가와

함께 협의해서 진행한다.

5. 재택근무, 1주일에 1번 회의

6. 이야기가 마음에 들면 정식 극본 계약해서 진행한다.

7. 극본 계약할 경우 계약기간은 2년이고, 만약 편성 논의가 진행된다면 계약은 자동으로 이어진다.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제작사 쪽에서 하는 조건들을 가만히 쭉 들었다.

몇몇 조건들이 황당했지만 따로 물어보거나 요구사항을 언급하지 않았다.

별 반응이 없다고 여겼는지 제작사에선


"3개월 계약인 게 좋더라고요. 작가님도 우리가 아니다 싶으면 계약 끝내면 자유롭고. 저희도 깔끔하고"

"네.."

"그리고 월급 받으시면 좋잖아요."


희미하게 눈만 가식적으로 웃었다.

기간이 문제가 아니라 월 150만 원인 것에 대해 적다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3번 조건이나 7번 조건등.. 궁금한 것들은 많았지만 3개월 내에 4부까지 작업 못하면 계약을 연장하면 되고

7번은 나중에 극본을 계약할 경우에 해당되니까 지금은 개의치 않기로 했다.

어쨌든 작업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소개해준 지인도 고려사항이었다. 좋은 사람이었고 나중에 함께 작업하고 싶은 사람이기도 했다.

나를 믿고 소개해 줬는데.. 지인이 혹시라도 곤란한 상황에 처하지 않길 바랐다.



제작사에선 다음 주에 계약서를 쓰자고 제안했다.

나는 알겠다고 하면서 2가지를 요청했다.


1. 미리 검토할 수 있게 계약서를 메일로 먼저 보내줄 것.

2. 원작 작가님과의 미팅


당일에 가서 읽으면 놓치는 게 많아서 미리 메일로 받아서 궁금한 사항은 제작사에 문의하고

서로 확실히 명시한 후, 내용을 조율하는 게 꼭꼭 필요하기 때문에 1번 사항을 요청했다.

그리고 2번 요청사항은 제작사 요건 중 4번 조건 때문이었는데

원작 작가님도 만나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웹툰도 봤고 제작사에서 원작 작가님이 웹툰에 대한 애착이 크신 분이라고 하니,

내가 보지 못한 뒷 이야기에 대한 방향성과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누군가 죽고, 죽이는 스토리에 대한 원작 작가님의 생각도 궁금했다.

그걸 다 듣고 나서 내가 잘할 수 있는지 확실하게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원작 작가님을 뵙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냐고 제작사에 물었고

제작사에선 좋다고 흔쾌히 원작 작가님과의 미팅을 잡아주었다.


집에 돌아와서 웹툰을 다시 꼼꼼히 보며 원작 작가님을 만나면 여쭤보고 싶은 것들을

꼼꼼하게 정리해서 파일로 남겨두었다.

개인적으로 생각나는 아이디어에 대해서도 메모를 해 두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계속 작품을 보다 보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의문도 계속 들었다.

아무리 공모전에서 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스토리가 없는 상태에서

왜 제작사에서는 원작 계약을 진행했을까? 도대체 그 재미포인트가 무엇인 걸까?

단순히 히어로물이라기엔, 히어로의 정체성과 신선함이 떨어지는 거 아닐까?

그렇다면 보는 이들의 마음에 가닿을 히어로여야 하는데

이렇게 쉽게 살인을 하는 히어로가 시청자들에게 가 닿을 수 있을까?

온갖 의문을 갖고 나는 부천으로 원작 작가님을 뵈러 갔다.



우선 결말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계약을 하지 않았다.

원작 작가님을 만나기로 한 것은 정말 내가 그해 가장 잘한 일이었다. 천만다행...

또한 앞으로 내가 계약을 진행함에 있어 중요한 기준점을 마련하게 된 경험이었다.

배웠다고 해야 할까?

물론 당시엔 무척 기분이 나빴지만..

원작 작가님을 만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써보고자 한다.



덧,

제작사는 신생으로 대표님이 이름대면 알만한 모 드라마 제작사 이사로 계시다가

나와서 차린 회사였고 오랜 경력으로 작가님들을 여럿 계약해서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냥 시나리오 모니터 해주는 기획팀 막내 계약직도 월 250의 월급을 받는다고 했다.

그리고 제작사 조건 중 극본 계약 후 단서가 붙는 저 7번 조항..

편성 논의 중이란 이유로 작가님들을 붙잡아 두고 희망고문을 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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