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감사할 것이 참 많다. 시댁에서 주시는 김치도,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식사도, 가족들과 함께하는 자리도. 모두 다 감사하다. 우리 가족은 주말이면 시댁에 가는데, 아이들은 토요일이 다가오면 할머니 집에 언제 가냐고 묻는다. 자신들을 사랑해 주고 챙겨주는 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한다. 뭘 해도 기쁘게 받아주시고 크게 반응해 주는 할머니의 사랑을 알기에 벌이 꿀을 빨아먹듯 아이들도 할머니의 사랑을 먹기 위해 시댁으로 향한다.
셋째는 어린이집에서 월요일이 되면 주말 지낸 이야기, 가 쓰인 종이에 지난 주말 무엇을 했는지 그림을 그려 발표한다. 선생님은 그림 위에 아이들이 한 말을 받아 적으신다. 하원 후 가방 속에 있는 종이를 보면, 매주 비슷한 내용의 문장이 쓰여있었다. '할머니 밭에 가서 언니들은 자전거 타고 나는 킥보드 탔어요.' 그래서 선생님은 "아이들이 할머니 밭에 자주 가나요?"라고 묻곤 했다. 나는 다양한 곳에 데려가 경험시켜 주는 부모로 비치고 싶었는지,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나는 그곳이 가장 편안하고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 아이들과 거의 매주 가고 있는데 마음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생각하고 있었다.
농사를 지으시는 시부모님 덕분에 우리 아이들은 매주 흙을 밟으며 하늘 위로 날아가는 새떼를 보고 자전거를 타며 논과 논 사이를 달린다. 할머니와 함께 토마토를 따고 당근을 뽑으며 돈주고도 못 살 경험을 한다. 누구보다도 아이들 교육에 진심인 나는 책상 위 공부만을 중점에 두지 않는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보내는 시간 속에 사랑과 추억이 쌓여 진심과 그리움을 아는 아이들이 되기를 바란다. 감수성은 공부만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조금은 내가 불편하고 어색해도 시부모님 댁과 농장으로 가는 이유다.
주말이면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 된다. 아이들의 증조할머니인 시할머니부터 시부모님 그리고 남편과 나, 아이들까지 총 4대가 한집에서 같이 밥을 먹고 잠을 잔다. 올해 90이 되신 시할머니는 아이들의 볼에 입을 맞추며 사랑을 표현하신다. 막내가 안 보이면 꼬맹이 어디 갔어하며 찾으시고, 아이들이 밥을 먹을 땐 옆에서 김치를 잘라주신다. 매운 것을 잘 못 먹는 셋째를 위해 김치를 씻어 접시에 놓아주신다. 아이들은 할머니 할어버지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난다.
신혼 초부터 시댁 근처에 살아 아이들을 낳고 기르며 시댁 어른들과 자연스럽게 가까이 지냈다. 모든 걸 다 함께했다. 좋은 것도 불편한 것도 다 보고 느끼며 지나왔다. 살가운 며느리도 아니지만 함께 한다는 것 자체로 정이 들었고 당연해졌다. 많은 말이 오가지는 않지만 얼굴을 비춤으로 남편과 내가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드렸다. 남편과의 갈등으로 시댁과 떨어져 있던 2년이란 시간이 무색하게 5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서로 이해하며 보듬는다.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고부지간이 시어머니의 배려로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이가 되었다.
특별히 무언가를 하는 건 아니다. 어디를 같이 가는 것도 아니다. 한 공간에서 같이 밥을 먹고 티브이를 본다. 거실과 방이 분리되어 있지만 집이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함께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시부모님은 꼭 와야 한다고 말하시지 않지만 우리 가족은 어딘가에 이끌리듯 시부모님 농장과 집으로 간다. 시부모님이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실 때 아이들은 할아버지 봉고차를 타고 시댁으로 온다. 남편과 나는 단둘이 차를 타고 오면서 라디오를 듣거나 간간히 이야기를 나눈다. 약간의 다툼이 있기도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자 공존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안에서 우리는 사랑을 느끼고 함께여서 다행이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한 해를 넘기고 새로운 해가 왔다. 우리는 또 한 해를 함께 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끼고 안정감을 획득했다. 안정 속에서 성장해 가는 우리 가족은 어떤 위기가 와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환경임을 알았고, 서로 받아들임을 배워나갔다. 말로 해서 아는 것이 아니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이 있으리라. 그 안에 희생과 배려, 이해가 있다. 우리는 가족 간의 사랑으로 한 뼘 더 성장해 간다. 사랑의 가치를 믿으며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사랑으로 채워간다.
시댁에서 맞이한 일요일 아침, 시부모님은 밭에 갈 채비를 하신다. 노란 플라스틱 바구니에 점심때 드실 반찬과 식사재료를 담으시는 중이었다. 셋째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따라 밭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시어머니는 그런 손녀를 쳐다보며 "할아버지한테 가서 가도 되냐고 물어봐"라고 하신다. 셋째는 부끄럽다 말하며 할머니 옆에 붙어 웃기만 했다. 시어머니는 셋째의 손을 잡고 방에 계신 시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시아버지는 "같이 가야지"라고 하시며 미소 지으셨다.
다섯 살 막내의 애교 섞인 미소에 시부모님은 그저 좋으신 듯했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시는 시부모님과 그런 할머니 할아버지를 잘 따르는 셋째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조부모님이 주시는 사랑이야말로 인생 최고의 선물이라는 울림이 왔다. 나를 사랑해 주는 어른들이 많다는 것은 성장해 나가며 마음을 단단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뭘 해도 어화둥둥 내 사랑하며 반응해 주시는 시부모님 덕분에 사랑스러운 아이로 자라고 있다.
언니들 없이 혼자서만 할머니 할아버지를 따라나서는 마음이 기특했다. 손녀로서 기쁨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이 귀하게 여겨졌다. 일하시며 아이를 보는 것이 방해가 될까 봐 걱정되었지만 사랑스러운 손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픈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져 아이에게 가지 말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할머니 옆에 붙어 쫑알대는 아이를 보며 어느새 저렇게 컸나 싶어 엄마껌딱지였던 시절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나도 저렇게 할머니를 좋아하고 사랑받았었나 하는 생각을 하며 어린 시절 투병하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렸다.
할머니와의 특별한 기억이 없어서일까, 우리 아이들만큼은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을 느끼며 자라기를 바랐다. 명절이나 제사, 그리고 할머니 생신이 있을 때마다 큰댁과 작은댁 모두 모이는 시댁에서의 풍경은 어릴 적 명절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어느샌가 큰집이었던 우리 집에 명절이 되어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날들이 늘어났고, 결혼 후에는 휑한 모습이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아이들이 친척어른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시댁인 친가뿐이기에 자주 방문하며 집안을 채우는 다복함이 자연스레 스며들게 되었다.
친척간의 교류가 거의 없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지만 반대로 남편에게는 처가의 분위기가 이해되지 않는 듯했다. 한 동네에서 사촌들과 뛰어놀며 자라왔던 남편은 때마다 친척어른을 뵙고 인사드리는 것이 당연했다. 결혼 후 어색하기도 했던 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친정과는 다른 분위기에 익숙해졌고, 며느리로서 큰집 제사를 돕고 인사드리는 것이 가족을 만나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졌다. 그것이 법도라고 생각하고 말씀하시는 어른들과 남편이 있어 친척간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이 개인화되고 혼자가 편하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가족 안에서 느끼는 사랑에는 함께 성장해 나가는 에너지가 있어 살아가는데 든든한 힘이 된다. 현실적으로 많은 보템이 되어주시고 사랑으로 반겨주시는 시부모님이 계셔서 감사한 날들이다.
사랑을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누구의 마음이 먼저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내 마음만 생각하고 행동하며 그것이 좋은 방향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깨닫기까지 10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상대를 위해야 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모른 채 지나가버린 시간이었다. 결혼 전에는 알지 못했던 사랑의 진실을 강산이 변하는 세월을 넘어서 알게 된 것이다. 그 진실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고, 내 마음대로 재단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며느리로서 누구나 떠올리는 가부장적인 모습에 당연하다 생각하고 지내왔었지만 시아버지에게 무조건 맞추는 것처럼 보이는 시어머니를 보며 이건 아닌 거 같아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친정집에서 엄마가 아빠에게 큰소리를 내거나 아빠가 엄마에게 맞추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시기도 했기 때문이다. 부엌일은 당연히 엄마의 몫이기도 했지만 때로 설거지를 돕는 아빠를 보았고, 엄마의 목소리가 더 큰 날도 있었기에 시댁에서 보이는 남자와 여자의 모습에 균형이 맞지 않다는 생각을 했었다.
시댁의 문화이기에 맞춰야 한다고 하시기도 했지만 결혼 후 2~3년간은 계속해서 내 안에 불만이 쌓여갔다. 남편 또한 가부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시대가 변했다 해도 변하지 않는 모습에 반감이 들었다. 그런 문화이기 전에 나를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에게 하는 모든 잔소리가 가부장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고쳐질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나대로의 생활을 유지해 갔다. 상의 없이 하는 일들이 많았고 소통이 되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랬던 우리가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생각의 변화가 없었다면 여전히 불평불만하며 지냈을 것이다. 가부장적으로 바라보던 시선에 사랑을 넣어 바라보니 그 안에는 시부모님의 희생과 인내가 있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어머니의 말하지 못하는 고충이 있었겠지만 자신이 선택한 결혼에 대해 책임을 지고 가족을 지키기 위한 애씀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선의 변화가 있은 후 시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돕고 함께 있는 것으로 내 역할을 다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가족을 사랑하는 남편의 마음을 알기에 남편이 부모님과 가까이 있을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하고자 했다.
남편이 어릴 적 농사일로 바쁘셨던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적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자주 얼굴을 뵙자고 마음먹었다. 남편 마음속에 있는 어린아이가 부모님을 찾고 있다고 느꼈고, 남편과 나 사이를 더 단단히 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어린아이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필요로 할 때도 아무 일이 없을 때도 언제든 찾아갔다. 부모님과의 사이가 더 가까워질 수 있었던 이유는 세 자녀 덕분이었다. 일하시는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쫑알대는 아이들을 보며 더 힘을 내시는 듯했다. 부모님이 열심히 농사지으시는 이유도 모두 가족을 위한 거라는 걸 깨달으며 부모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감사하게 되었다. 부모님과 함께하는 따뜻한 시간이 쌓일수록 남편과 나 사이도 더 다정해지고 나를 향한 남편의 사랑이 더욱 커짐을 느낄 수 있었다.
작가님들께 ⸜❤︎⸝
부모님을 향한 남편의 사랑은, 사소한 챙김으로 채워집니다.
시부모님의 작업장에 있던 망가진 tv를 중고로 저렴히 사서 바꿔드리고 어두운 곳에 형광등을 달아드렸습니다. 토마토를 상자에 담으실 때 어두워 보였나 봅니다. 부모님을 세심하게 챙기는 모습이었습니다. 남편이 시부모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마음을 느끼시곤 연신 밝아서 좋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이라는 건 거창한 것이 아니구나,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 또한 효도일 수 있지만, 가장 좋은 효도는 옆에 있어드리는 거라는 것을 남편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남편에게 부모님과의 사랑을 더욱 크게 느낄 수 있도록 돕고 싶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제가 남편을 사랑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같이 음식을 나눠 먹고 별거 아닌 거에 웃으며 행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 또한 친정부모님과 멀지 않은 곳에 살아 엄마가 도움이 필요할 때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핸드폰 어플 사용하는 법을 알려드리거나 직구를 위해 해외통관번호를 찾는 것 등을 도와드렸습니다. 비용이 들지 않는 효도였습니다. 꼭 성공해서 보답해 드리는 것만이 효도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 날들이었습니다.
작가님들은 부모님과 어떤 시간을 보내고 계신가요?
오늘도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가족 안에서 흔들릴 때
그런 나를 감싸 안으며
나 자신을 토닥였습니다.
마음이 단단한 사람으로 성숙해 가는데 이 책이 도움이 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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