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감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강남 한복판을 걷고 싶다. 지금 당장. 사람들로 북적이는 그곳에 가고 싶다. 수많은 인파 속에 묻혀 그 거리를 걷고 싶다. 높은 빌딩들 사이로 이어진 수많은 상가들을 하나하나 들어가 구경하고 싶다. 옷도 만져보고 구두도 보고 액세서리도 보고. 입어보지 않아도 신어보지 않아도 착용해보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걷기만 해도 보기만 해도 좋다. 그러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카페에서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들이켜고 싶다.


그럴 수 있는 자유가 그립다. 마음대로 쏘다닐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비록 집은 멀더라도 버스로 1시간 이상 가야 한대도 좋다. 버스에 사람들로 꽉 차 서서 가야 한대도 좋다. 귀에 이어폰 꽂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싶다. 수많은 사람들과 그곳에서 느껴지는 바쁨도 내겐 여유이며 에너지가 된다. 그래서 공부도 안 좋아하면서 강남에 있는 영어학원을 다녔던 것일까.


아무 연고도 없는 그곳에 이방인이 아닌 것처럼 나는 서울을 누비고 다녔다. 지하철과 버스만 있다면 어디든지 갈 수 있었다. 콩고물을 발라놓은 것도 아니었는데 뭐 그리 달콤한 디저트를 찾듯이 뻔질나게 다녔을까. 그때를 생각하니 순간 20대 초반으로 돌아간 듯 머리가 빙 하고 돌았다. 몇 초였을까. 짧은 섬광처럼 내 머리와 심장에 스쳐 지나갔다. 무슨 일일까. 그곳에 더 있고 싶은데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강남역 지하상가에서 먹었던 김치볶음밥이 생각난다. 그 당시 내가 가진 돈으로 최대한 사 먹을 수 있는 것 중의 하나였다. 소박하면서도 사치처럼 느껴졌던 최고의 외식이었다. 가게 옆 복도에 놓인 식탁에서 그렇게 김치볶음밥을 먹었다. 집에서 특별한 재료가 없을 때 자주 해 먹는 음식인데, 그때는 내게 적절한 외식 음식이었다. 지금도 같은 맛있까?


심장이 두근두근 거린다. 책을 읽다 갑자기 강남역에 자주 갔었던 그때가 떠올라 반가웠다. 그때의 기억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와 내가 갈구하고 있었던 것이 그곳에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 당시 내가 살고 있었던 곳은 수원이었는데 강남에서 수원까지 거의 두 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지금은 그 시간이 너무 금쪽같아서 이동하는 시간으로 도저히 두 시간을 쓸 수 없다. 그런데 그땐 그게 가능했다니.


높은 빌딩들 사이 일렬로 늘어진 가게들을 구경하며 걷는 건 또 하나의 재미였다. 특별할 것도 없는 내 인생에 그 가게들이 좀 더 특별해 보였던 걸까. 비싼 세를 감당하면서 그곳에 떡하니 지키고 있는 가게들을 보며 내 몸값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번듯한 기업들 그 속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점심때가 되면 사원증을 목에 걸고 나와 만원 이상 하는 점심을 먹은 후 한 손엔 커피를 들고 걸었다. 내가 매일 들어가 먹을 수 없는 그곳의 음식들과 비싼 커피는 로망이었고 구경거리였다. 지금은 저렴한 가격의 커피도 많이 팔지만 20대 초반의 나는 매일 마실 수 없었다.


강남역에 가본 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얼마나 바뀌어 있을지 그대로 일지 궁금하다. 그때 보았던 가게들이 그대로 있을지. 수강생들로 꽉 찼던 영어학원도 그대로 있겠지. 지금도 강의실 안엔 빈자리 없이 꽉 차 있을까. 학원 끝나고 즐겨 찼던 던킨도너츠도 그대로 있을까.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내 머릿속에 그곳의 풍경이 그려진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내가 지금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그땐 그 시간이 영원할 거라 지나가지 않을 거라 여기지 않았을까?


시간은 야속히도 이리 흘러 나이 40을 바라본다. 아직 내 영혼은 어리기만 한 것 같은데 말이다. 어젠 친한 동생과 통화하며 우리가 중학교 때 처음 만났던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가 만난 지 벌써 20년이 지났다는 사실에 덤덤하면서도 알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그동안 지금의 나만 고민하고 생각했었는데 새삼스레 과거의 어린 나를 떠올리게 됐다. 잊고 있던, 아니 잊고 싶었을지도 모르는 과거의 나와 풍경들이 지금의 내겐 어떤 의미일까. 후회의 감정이 뒤엉킨 기억은 아니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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